나의 조그만 틀이 부서질 때

박영식, 『창조의 신학』 (동연, 2018)


어진성 (인천대학교 화학과 학부생)



뇌과학자 정재승 씨가  열두 발자국이란 책이 있습니다.  책을 어느 유투버가 소개하면서 정재승 씨에 대해 이렇게 평가를 합니다. “과학이 재미있다고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을 통하여서 지혜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연과학 학부생이고, 신학에 대해 자세히 모르는 교회 청년으로서 <창조의 신학>에 대 평을 감히 내리자면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책은 신학자와 과학자의 잘잘못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삶을 돌아보고, 공동체의 삶을 돌아보고, 한국 교회의 삶을 돌아보라는 지혜가 담긴 편지입니다.


저는  책을 보고 '어느 이론이 현실에 더욱 적합하다, 누구의 이론이 맞다 틀리다'가 아니라 하나님을 알기 위해 노력하는 신앙의 선배들의 이야기와 지금의 우리에게 전하는 위로와 지혜가 숨겨져있다고 느꼈습니다주제에 따라 고대 철학과 종교적 이념에서부터 현대 신학자들의 다양한 이론까지 차근차근 설명해줍니다. 시대와 역사에 따라 대립되는 이론들의 다툼과 화해,  역사들을 통해 우리가 가져야 할 견문과 태도를 때로는 진득하게 때로는 물음표를 던져주며 대답을 강요하지 않고 우리에게 생각할  있도록 기다려줍니다. 책을 덮고, 잠시 눈을 감기도 하고, 높은 하늘을 올려다볼 여유를 선사합니다.
 


사실 저는 교회 청년부에서 창조과학에 대한 간단한 발표를 준비하면서 이 책을 접하게 되었습니다처음에는 만화로 된 <창조론 연대기> 그리고 나서 <아론의 송아지>, <과학시대의 도전과 기독교의 응답>과 같은 책들에 바탕으로 발표를 준비하던 차에 과신대 모임에서 <창조의 신학>을 접하게 되었습니다비슷한 내용들이 있을 거라 생각을 했고, 처음엔 어디   읽어보자는 거만한 마음으로 책을 접하게 되었죠. 그런데 책뿐만 아니라 교수님과의 모임을 통해서 챕터를 쓰게  배경들에 대해서도 듣고, 과학에 대해 고민하는 젊은 호기심들을 느끼며,  책이 점점  인간적으로 다가오더라고요.
 
기독 청년으로써 무신론자들을 대하는 교수님의 지식과 지식을 전달하는 자세가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교회를 다니면서 '이것이 무조건 맞다, 그것은 절대 아니다. 상대를 하지 말아라, 그냥 피해라'라는 극단적인 조언들을  또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처음엔 젊은 지구론도 그렇게 잠깐 받아들이기도 했었죠. 하지만 창조론에 대해  알아가며 치우치지 않으려 많이 노력했습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내에선 아직 그러한 변화에 대한 반응과 민감함이 크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을 통해 제가 배운 것은 2가지입니다. “똑똑할수록 겸손해진다.” “지나가던 나그네의 옷을 벗기게 한 것은 태양이었다.”라는 것을요. 여러 자기계발 SNS 페이지들에 올린 영상들을 접하면서 어중간한 지식이 가장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또한 그랬고요.  책은 나보다 똑똑한 사람의 겸손함을 적나라하게 시사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왜?'라는 질문을 통해서 우리가 놓친 부분들을 상기시키고, 대립되는 주장에 아킬레스건들을 정확히 건드리며 고민하게 만들죠. 대립이 아니라 대화였습니다.
 


<창조의 신학>은 대화를 담은 책입니다. 과거와의 대화, 현재와의 대화, 창조의 하나님과의 대화, 대립과의 대화다양한 매개체들과의 대화를 통해 제가 아는 하나님의 영역이 훨씬  넓어지게 되었고, 전지전능함을  느낄  있었고, 아버지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악이 무엇인지를 다룬 8장에서 교수님은 학자들의 다양한 관점들을 소개하고 함께 비추어보며 우리가 지금 고민해야 할 것들을 던져주십니다. 9장에서는 악을 이야기하면서도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보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들을 통해 나 자신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삶 속에 모신다고 고백하면서도 정작 하나님이 찾아오셨을 때는 그분을 몰라뵈고 있지는 않는지 되돌아봤습니다. 하나님을 선포할 때조차도 하나님을 시간에 가두고,  옛날 과거의 사건에 가두었던 지난날이 부끄럽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나고 배워나갈수록 신학이란 학문에 엄청난 힘이 있음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문득 친구 사역자들이 ‘신학을 배우는 것이 좋다‘라고 얘기하는  보곤 했는데,  책을 통해 다시   하나님을 바라보는  식견이 평신도로서 얼마나 좁았는지를 느낄  있었습니다. 치열한 고민과 생각 속에서 만들어진 신학을 읽으며,  스스로 신학을 학문적으로 낮게 봤던 것이 부끄럽습니다.

 
성경의 처음 이야기하는 창조는 단지 구약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삶 속에서 창조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해 줍니다.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신앙은 삶의 가능성에 대한 희망을 제시하며, 평화를 약속한다.”
 
이 책을 통해 하나님을 가둬두고 믿었던 나의 조그만 틀이 부서졌습니다.  마음 깊은  잔해들과 함께  책은 에필로그를 마칩니다일과 휴식의 조화를 이루며, 끊임없이 창조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인정합니다. 기억하고, 가슴에 새길 것입니다. 이전 것을 버리고, 창조의 하나님과 함께 새로운 프롤로그를 써 내려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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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라도 기꺼이 새롭게 숙고하기


『아담과 하와의 잃어버린 세계』 (존 H. 월튼, 김광남 역, 새물결플러스)


서평 | 백우인 (과신대 교육/출판이사)



시대의 변화는 떨어지는 물방울에 돌이 닳듯이 천천히 변하기도 하고 엄청난 해일이 돌을 산산조각 내는 대격변이기도 하다. 생명과학의 기술이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인간의 사유가 쉽게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오늘날,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논쟁들 가운데 하나는 성서와 과학과 인간의 기원과의 관계가 아닐까?


월튼은 성서 자체는 변하지 않을 지라도 오늘날 성서에 대한 우리의 해석이 훨씬 더 역동적이며 그로 인해 나타나는 신학이 계속적인 재평가를 받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성서 해석자이자 신학자로서 신학적 전통이 중요하지만 해석과 해석의 도구로 삼고 있는 해석학조차 시대를 따라 변해왔다고 말하면서 새로운 통찰과 정보는 어느 때라도 나타날 수 있다고 말한다. 


과학은 150년 동안 혁명적인 변화를 겪었다. 진화론은 발전의 시작이었고, 유전학의 발전은 유전자의 염기서열을 비교함으로서 인류의 공통 조상을 찾고, 21세기 초 인간 유전체의 정보를 읽어내는 인간게놈 프로젝트가 완료된 후 생명과학기술은 놀라운 속도로 진보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인간이 직접 유전체를 합성하여 인간을 비롯한 생명체를 창조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 ‘포스트게놈 시대’를 살고 있다.


인류의 진화 역사는 어떨까? 수 백 만년 동안 계속 되어온 인류의 진화 역사에는 커다란 흐름이 있다. 그 흐름은 직선이 아니라 꼬불꼬불한 발자취를 보여준다. 진화의 역사의 방향에 정답은 없다. 이상희 박사는인류의 기원에서 “진화에 유익한 형질, 적응에 유리한 형질은 우연의 작품이다. 우연히 이루어진 환경의 변화 속에서 마침 우연히 생겨난 형질이 유익했고 유익한 형질을 가지고 있는 개체가 더 많은 자손을 남겼을 뿐이다. 어느 한 때 유익하다고 영원히 유익하지 않다. 모든 것은 변한다. 그때 적합한 선택을 해서 앞으로 나아갔던 것뿐이다.” 라고 말한다. 


월튼의 『아담과 하와의 잃어버린 세계』는 인간 기원 문제로 고민하는 수많은 그리스도인에게 인지부조화의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다. 그는 인간의 기원에 관한 현재의 합의에 의해 제기되는 위협은 과장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과학의 원칙에 의거한 과학의 합의가 의심스러울 경우 이를 맹목적으로 수용해서도 안 되지만 과학의 결론들이 성서의 믿음에 어떤 위협도 제기하지 않는다는 이해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고대 문서로서 또한 경전으로서의 성서에 대한 면밀한 읽기를 수행하면서 창세기에 초점을 맞추지만 실제로는 경전 전체를 고려한다. 성서에 대한 충실한 읽기를 통해 이런 읽기들이 과거의 몇 가지 전통적 읽기와 얼마 간 다를 수 있지만 그 다름 또한  본문 안에서 지지를 발견할 뿐만 아니라 최근의 과학적 발견 중 어떤 것은 우리가 고대 근동이라는 상황 속에서 발견하는 것과도 양립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컨대, '성서와 과학이 인간의 기원에 관해 상호 배타적인 질문을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현재의 과학적 합의는 인간이 다른 종들과 공통 조상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인데, 이는 물질적(계통 발생적) 연속성이라는 증거에 기초한 주장으로 성서 본문에 대한 면밀한 읽기와 신학적 연구는 그것들이 이런 물질적 연속성과 공통 조상을 감안하고 있음을 지적해왔다고 말한다. 창세기를 고대 근동의 문헌으로 신중하게 읽는 일은 공통혈통과 본질적으로 충돌하지 않는 역사 또는 인간 게놈을 통해 관찰 할 수 있는 역사로부터 얻어지고 또한 그것으로부터 추론되는 주석적 결론과 신학적 확언을 낳는다고 주장한다.


월튼은 성서의 내용을 그 문화적 상황이나 현대의 과학과 일치시키도록 강요해서는 안 되며, 고대 세계의 문헌으로부터 나온 정보나 과학적 탐구를 통해 얻은 통찰이 우리로 하여금 성서로 돌아가 우리의 해석을 재고하도록 적절하게 자극할 수도 있음을 주장한다. 『아담과 하와의 잃어버린 세계』는 성서본문은 전통으로부터 나름의 자율성을 지녀야하고 언제라도 기꺼이 성서 본문으로 돌아가 이를 새롭게 숙고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성서의 권위에 관한 견고한 확신과 성서의 해석 위에 세워진 전통을 바탕으로 작업하지만 신학적 틀 내부에서는 성서본문을 새롭게 읽을 수 있는 여지가 많다는 것이다. 



월튼은 이 책 아담과 하와의 잃어버린 세계 에서 창세기 서두를 읽을 때 두 가지 사항에 유의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첫째, 창세기를 현대 과학의 기준으로, 즉 과학책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 둘째, 창세기는 고대 근동의 세계관에 공통 바탕을 둔 고대의 문서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유감스럽게도 많은 그리스도인이 이 두 가지 기초적인 사항을 외면하고 창세기를 읽은 결과, 고대 근동 문화와 세계관의 기반 위에 쓰인 성서의 이야기를 현대 과학의 관점에서 문자적으로 오독하는 우를 범한다. 그 대표적인 형태가 바로 소위 젊은 지구 창조론으로 대표되는 창조과학 현상이라고 지적한다.


창세기는 고대 문서이다. 성서의 권위는 불가피하게 저자의 의도와 연결되어 있다. 다시 말해 창세기를 읽을 때 고대문서를 읽는 것이며 따라서 고대 세계에서 적절했던 가정들을 사용하는 것으로 시작해야한다. 고대인들이 어떻게 사고했는지 그리고 그들의 소통의 근간을 이루는 개념들이 무엇이었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월튼에 따르면, 창세기 1장이 말하는 기원 이야기는 물질적 우주보다 질서, 기능, 역할 등과 연관되어 있다. 창세기 2장은 에덴동산으로 알려진 성소라는 지구의 중심의 설립에 대해 이야기 한다. 아담과 하와는 성소를 섬기는 제사장이며  모든 인간을 상징한다. 그러나 그들이 스스로를 하나님의 자리에 세워 질서의 중심이 되려는 죄를 짓는다. 말하자면, 창세기 3장은 최초의 죄에 관한 이야기라기보다 질서가 잡히는 과정 중에 있는 세상 속으로(죄에 의해 초래된) 비질서가 잠식해 들어오는 일에 관한 이야기,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어떻게 멀어지게 되었는지에 관한 이야기이다. 창세기 1장부터 3장까지의 이야기를 통해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소명을 받아 선발된 문자적 의미에서 최초의 인류가 아니라 인류 전체의 운명을 테스트할 대표자로서 선발된 원형적 존재이며, 또 아담이 원형적 존재일 때만 구약 이스라엘과 신약의 메시아인 예수 그리스도가 원형적 존재로서 온 세상의 운명을 짊어진 존재라는 사실이 확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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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론자들 (로널드 L. 넘버스, 신준호 외 역, 새물결플러스)


서평: 이광형 (장로회 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졸업, 동 대학원 구약학 Th.M 재학 중, 초원교회 교육 목사)




무오(無誤)에서 무지(無知)로


먼저 이 책의 제목에서 ‘창조론자들’이라는 말은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창조를 믿고 신앙하는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닌 ‘과학적 창조론’ 혹은 ‘창조과학자’들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나는 사실 이 책의 저자인 로널드 넘버스가 어떤 사람인지 몰랐기에 책을 읽기 전에는 아마도 창조과학 쪽에 있는 사람들의 주장이 어떤 면에서 틀렸는지 학문적으로 비판하는 책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 책은 어느 쪽 주장에 대해서 (적어도 명시적으로는) 옳고 그름을 논하려는 것이 아닌 창조론자들이 어떤 신학적 노선 안에서 시작하여 어떤 길을 걸어왔고 이제 거기에 ‘과학’이라는 이름까지 붙이게 되었는지를 서술하는 일종의 사상사 내지는 그들의 발자취를 기술한 책이다. 로널드가 과학사/의학사 분야의 교수라는 점에서 이해하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책을 읽는 내내 로널드라는 사람의 철저한 자료조사에 감탄을 금치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창조론자들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정말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알고 또 거기에 명확한 근거들을 대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서문에서 자신은 원래 근본주의적인 제7일안식일예수재림교의 목회자 가정에서 태어났고 과학을 전공했지만, 창조론을 주장하던 사람이었음을 밝힌다. 그러다가 창조과학자들이 흔히 주장하는 젊은 지구론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경험하게 되면서 창조과학에서 돌아서게 된 이야기를 밝힌다. 그러므로 책의 내용 자체는 객관적인 서술을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창조과학자들이 어떻게 지난 1세기 동안 어떻게 자신들의 자리를 만들어왔는지 또한 자신들의 위치를 확고히 하기 위해 어떻게 증거를 왜곡하고 조작했는지 그러면서 어떻게 세계 곳곳으로 확장해 나갔는지를 여과 없이 보여줌으로 저자가 반창조과학적인 입장에 서 있음을 보게 된다.


최근에 SNS에서 활발하게 활동을 펼치는 우종학 교수를 중심으로 많은 기독교인, 신학생, 목회자들이 창조과학에 대해 다시 재고하게 되고, 그들의 오류에 대해서 알게 되어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대부분 창조과학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입장을 비판할 때, 그들이 성경에 대해 ‘문자주의’ 혹은 근본주의자들이라고 이야기한다는 점이다. 이 책에서도 근본주의자라는 말들이 서슴없이 등장한다. 근본주의 운동은 사실 유럽으로부터 건너온 급진적 자유주의의 신학 사조에 맞서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까지 미국에서 전개된 운동이다. 한국에서는 소위 자신들을 개혁주의라고 자처하는 보수 신학계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고, 이는 주로 신학계에서 사용되는 용어이다. 그런데 이러한 근본주의라는 말이 바로 이 창조론자들(창조과학자들)에게 적용될 뿐만 아니라 이렇게 까지 깊은 연관성을 보여주는 것에 흥미로웠다. (물론 성서해석의 측면에서 당연할 수 밖에 없지만 말이다)


그러나 창조과학을 공격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좀 더 분명히 해야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창조과학은 단순히 문자주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혹은 근본주의자=문자주의자라는 생각이다.


옥스퍼드의 구약학 교수를 지냈던 제임스 바(James Barr)는 그의 『근본주의 신학』이라는 책에서 날카로운 지적을 하고 있는데, 근본주의자는 “성서를 문자적으로 취급”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근본주의자들과 다른 사람들의 차이점은 문자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오성에 있다. 여기서 성서의 무오성이라 함은 성서가 과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나 한 치의 오류도 없음을 지키고자 하는 교리다. 실제로 근본주의자들의 성서 해석을 보면 모든 성서를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그들은 성서의 무오성을 지키기 위해 성서의 과오를 인정하지 않는 방법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근본주의자들은 성서에 대한 문자적 해석과 비문자적 해석 사이를 왔다갔다 한다. 다시 말해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것은 무오성이지 문자성은 아닌 것이다. 이것은 『창조론자들』 을 통해서도 어느정도 알 수 있다. 나도 한 때 한국의 창조과학자들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들은 성경이 ‘정확무오’하다는 이야기를 심심치 않게 한다. 결국 그것은 그들이 근본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뜻이 된다.

이 책에서 흥미로웠던 점은 창조과학자들이 과학자가 되는 과정 속에서 이들이 바로 안식교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또한 이들은 처음에 미국 학교에서 진화론을 가르치는 것에 대해 매우 공격적인 전략을 택했으나 후에는 전략 노선을 수정하여 정치적인 압박을 통해 오히려 창조과학을 학교의 공교육에 넣으려고 했다는 사실도 매우 흥미롭게 읽었다.


그것은 곧 창조론을 ‘과학적 창조론’ 혹은 ‘창조과학’으로 명명하면서 자신들의 방향을 과학의 방향으로 몰고 가려 애썼으며, 과학으로 재포장하려 했다는 것. 게다가 그러한 과정 속에서 창조과학자 버딕은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박사 학위가 필요 했는데, 애리조나 대학에서 박사는커녕 석사 학위도 받지 못했고, 결국 실체도 없는 대학의 박사학위를 받은 것으로 속이게 된다. 이러한 창조과학자들의 역사에서 결국 창조론자들이 걸어온 발자취는 그들이 성서에 대해 확고한 신앙만큼 행위가 따라가지 못하는 거짓된 자들임을 보여주며, 창조과학에 ‘과학’이라는 이름은 적어도 붙일 수 없는, 적어도 과학에 있어서는 비전문가들로 구성되었음을 보여준다.


로널드가 서문에서 밝힌 것처럼, 책의 말미는 증보판에 덧붙여진 내용인데, 지적설계와 창조론자들의 최근 흐름 및 창조과학자들의 세계 지형도까지 안내하고 있다. 더불어 교회 안에 창조론자들이 어떻게 침투하였는지, 또 주요 교단들에게 미친 영향도 소개하고 있으며, 가톨릭과 유대교에게도 어떤 관계를 맺었는지까지 보여준다.


그러나 가장 흥미를 끌었던 점은 창조론의 세계화 부분에서 ‘한국’까지 다루고 있다는 점이었다. 로널드는 아시아에서 특별히 한국인들이 창조과학자들을 위한 발전소 역할을 하고 있다고 평가하며 ‘한국창조과학협회’ 이야기까지 상세하게 다룬다. 특히 1990년대로 넘어와서 서울에서만 1500여회의 세미나를 개최했다는 사실에서 한국은 적어도 아시아에 있어서는 “창조론의 수도”라고 명명할 수 있을 정도라고 로널드는 평가한다.


창조과학자들의 무서운 점은 그들이 ‘과학’으로 승부가 나지 않아서인지 법률적, 정치적 공세를 폈다는 점이다. 로널드는 미국 여러 주의 공화당원들이 자신들의 공약에 창조론 항목을 추가했고, 창조과학자들은 미국 전역에서 지역 교육위원회의 선거에 출마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여기까지 읽었을 때, 필자가 장로회신학대학원을 다니던 시절이 잠깐 떠올랐다. 매 학기 초마다 열리는 신앙 사경회의 선택 특강 시간에 유명한 한국의 창조과학자의 강의가 포함되어 있었던 불과 몇 년 전의 일이 떠올랐다. 적어도 장신대의 조직신학 및 성서학의 입장은 그러한 근본주의적 영향과는 매우 거리가 먼데, 어떻게 그들이 신학교 안에까지 들어와 강의를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커다란 수치를 느끼면서도 창조론자들의 책을 통해 그들의 정치적 공세는 아니었는가 음모론 아닌 음모론도 생각해보게 되었다.


무엇보다 성서를 근본주의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 좋은 것은 아닌데, 가장 무서운 점은 표면적으로 볼 때 그들의 신앙이 더 좋아보인다는 점일 것이다. 그러나 『창조론자들』은 그들의 포장을 벗겨내고 그들의 속내를, 그리고 그들이 지나온 과거를 정확하게 볼 수 있도록 해준다는 점에서 이 책이 가진 의의는 크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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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론 연대기 (김민석, 새물결플러스)


김영웅 

(포스텍 분자 생물학 박사, 미국 City of Hope에서 백혈병 연구)



일주일 만에 배송이 되어 (여긴 미국이다), 기대감으로 책을 순식간에 읽어 버렸다. 너무나 맛있는 음료를 마셨는데도 계속해서 빨대를 빨고 있는 기분이랄까. 책이 길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찐하게 남는다


성인이 되어 만화책을 본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어제 점심 시간에 카페테리아 구석진 곳에 앉아 혼자 밥을 먹으면서 키득키득대며 읽었는데 ( 사람이 힐끗힐끗 쳐다보는데, 어쩔 없었다. 그런 것따위 신경 겨를이 내겐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재미있게 권을 읽어본게 언제였던가 싶다. 김민석 작가의 실력에 경탄을 금할 없었다.


책은 만화만이 가진 장점을 최대한 살리고 있다. 풍선 안에 적힌 문장들을 모두 합한다고 해도 위에 언급한 책이 가진 텍스트의 반의 반의 반도 안되겠지만, 책이 전달하는 임팩트는 그에 못지 않다. 만화는 글뿐 아니라 그림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물들의 표정과 행동에서, 그리고 인물들이 활동하는 시간과 공간으로부터 우리들은 글로는 충분히 표현할 없는 무언의 감정을, 마치 브레인을 통과하지 않는 것처럼, 빠르게 게다가 아주 효과적으로 느낄 있다 (실제 만화를 보며 우린 우리 자신을 만화 시공간에 배치시키지 않는가!). 그것은 오디오와 비디오의 차이로 설명할 수도 없고, 글과 그림의 차이로도 설명이 충분하지 않다. 만화만이 있는 유닉한 파트가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다. 만화 작가의 입장에선 풍선 안에 담을 글을 최대한 요약할 알아야 하고, 이를 위해선 정확하고 좋은 문장을 선별할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런 능력은 모두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이름도 빛도 없이 묻힌 작가의 부단한 연구와 성실한 노력이 선행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김민석 작가에게 박수를 보내지 않을 없다.

개인적으론 무크따와 아론의 송아지를 먼저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시간이 지나면서 진화론과 창조론을 이해하는 있어 중요한 개념들과 역사적 사건들을 대다수 잊어버리게 되었는데 ( 책이 설명을 못한 아니라, 나의 롱텀 메모리 능력이 바닥이라고 그런 거임), 창조론 연대기를 보며 아주 선명하게 개념이 다시 기억이 나고 정리가 되었다. 물론 무크따와 아론의 송아지에서도 중간중간에 도표와 그림을 삽입시켰지만, 창조론 연대기에서 보여준 만화 정리는 정말 내겐 통쾌하고도 명쾌했다. 역시 만화만이 가진 매력이 분명 존재하는 거다. (새물결플러스에서 지속적으로 만화를 매개로 하여 신학, 과학, 인문학 등을 지속해서 출판해 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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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론의 송아지 (임택규, 새물결플러스)


서평: 김영웅 (포스텍 분자 생물학 박사, 현 미국 City of Hope에서 백혈병 연구)



먼저, 무크따를 먼저 읽고 아론의 송아지를 읽게 된 순서는 아주 바람직했던 것 같다. 출판된 시기가 그렇지 않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아직 두 권 모두를 읽어보지 않은 사람들의 독서 방향에 있어선 하나의 힌트가 될 수도 있겠다. 개인 교습으로 입문을 했다면, 이제 재미나고도 적절한 비유와 예시를 동반한 강연을 들을 차례다.


앞서 언급했듯이, “아론의 송아지”는 하나님을 눈에 보이는 형상 속에 가두어 버리는, 우매하고도 이기적인 인간의 속성을 반영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가 시내산에서 오랫동안 내려오지 않자 불안해져서 그들이 지니고 있던 금 조각을 모두 모아 아론을 중심으로 송아지 형상을 만들어 그것을 하나님이라 명하고 의지하게 되는 사건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 저자는 그 기록으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어 젊은 지구론으로 대변되는 창조과학을 이스라엘 백성에 대치시키고, 송아지 형상을 성경의 문자에 대치시킨다. 하나님을 근본적으로는 믿지만, 그 믿음이 너무나 근본주의적이어서 문자 그대로를 믿게 된 무속적인 기독교인들이, 하나님과 기독교를 보호한다는 명목 하에, 만들어낸 창조과학이 실제로는 하나님을 성경에 씌여진 문자 속에 가두어 버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책에서 저자는 아주 적실하게 꼬집어 낸다.


이 책의 부제인 “젊은 지구론에 대한 합리적 비판”에서도 쉽게 읽어낼 수 있듯이, 이 책의 메인 타겟은 젊은 지구론으로 대변되는 창조과학이다. 그 그룹에 속한 비합리적이고 비과학적이며 하나님과 기독교를 스스로 보호한다고 할 만큼 영성이 지나치게 높은, 자칭 기독교인이라 하는 사람들의 무속적인 면을 하나씩 파헤친다. 그러나 아무런 배경 지식이 없는 사람이 읽어도 쉽고 재미있게 술술 읽을 수 있을만큼 저자의 글쓰기는 탁월하다. 요즘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라면, 세상 돌아가는 흐름을 대충이라도 읽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신을 믿든 안 믿든 상관없이, 이 책을 읽을 땐 아마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되리라 생각한다. 제목부터가 성경에 나오는 단어이기 때문에 지레짐작하며 책을 멀리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묵직한 주제를 저자가 가진 쉬운 번역 (어려운 내용을 이해하기 쉽게) 기술로 인하여 대중적으로 재미나게 접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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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론 기자, 크리스천 과학자에게 따지다 (우종학, IVP)


서평 | 김영웅  (포스텍 분자 생물학 박사, 현 미국 City of Hope에서 백혈병 연구)


본격적인 이야기는 어느 신문사 과학부를 담당하고 있는 박 기자라는 나한교 (나도 한때 교회 다녀봤어)가 우연찮게 그의 과거 주일학교 선생이자 현재 대학 교수인 한 별 박사의 저서 소개 기사를 작성하는 일을 맡게 되고 인터뷰까지 직접 하게 됨으로써 시작이 된다. 오랜만에 만난 사이, 세월이 벌려 놓은 서먹한 둘 사이의 간격은 비단 과거 선생과 제자 간격이나 현재 교수와 기자 간격만은 아니었다. 세월은 그 둘을 신앙인과 비신앙인,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으로도 갈라놓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갈라놓은 원인의 무게중심은 수동적 의미의 세월이란 요소뿐 아니라 능동적 요소라고 할 수 있는 '과학과 신앙에 얽힌 해묵은 편견'에도 있다고 봐야 것이다 (이렇게 해석하는 이유는 이 책의 요지와 잘 부합하지 않을까 생각해서다. 저자가 왜 하필이면 한 교수를 박 기자의 과거 주일학교 선생으로 설정했겠는가. 무엇보다 이 책의 부제는 '과학과 신앙에 얽힌 해묵은 편견 걷어 내기'다. 이는 저자 우종학 교수님이 책 전체에 걸쳐서 일관되게 던지고 있는 메시지와도 같다).


박 기자와 한 교수의 간격은 우리들 사이에서도 존재한다. 편견은 기독교의 이름을 가진 무속신앙을 강화시키고, 강화된 무속신앙은 편견을 기정 사실화시키는 강력한 교주 역할을 한다. 악순환의 고리에 의해 그 교주의 힘은 점점 막강해져서 한국 기독교라는 옷까지 입고 교인들에게 그들이 기정 사실화시킨 편견을 복음과 함께 뿌린다. 이런 의미에서 편견은 가라지와도 같다. 주인의 곡식 사랑하는 마음 덕분에 가라지는 곡식이 자라는 동안 뽑히지는 않겠지만, 추수 때가 이르면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져 불사르게 단으로 묶어질 것이다.


박 기자와 한 교수의 재회는 두 사람의 간격을 메우는 물꼬를 튼다. 첫 인터뷰에 이어진 한 교수 강연에의 참석, 또 그 이후 연이은 두 번의 만남을 통해 박 기자의 창조론에 대한 자세는 서서히 바뀐다. 그 동안 자신이 가져왔던, 과학과 신앙이 서로 대립된다는 생각이 실제로는 잘못된 편견일 수도 있겠다는 진지한 의심을 하게 되고, 그로 인하여 부차적으로 다시금 크리스천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도 그의 마음 속에서 싹트게 된다 (이는 잘못된 편견의 수정이 회심의 열매까지도 맺을 수 있는 힘도 가질 수 있다는, 또 하나의 중요한 메시지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즉, 과학과 신앙에 얽힌 편견을 제거하는 작업이 아프리카 오지에서 언어와 문화를 새롭게 배워가며 복음을 전하는 것만큼이나 전도와 선교의 중요한 축이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이런 면에서 우린 어쩌면 비기독교인들의 과거 탈기독교 과정의 메커니즘을 좀 더 연구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박 기자는 대다수의 우리를 대변하는 듯하다. 과학과 신앙의 차이를 무신론과 신론의 차이나 비기독교와 기독교의 차이와 동일시하는 한국 기독교의 암묵적이고 비합리적인 교육 체제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낼 수 밖에 없었던 우리들의 슬픈 자화상이다 ("창조론 연대기"에서 김쑤가 자기에게 상처를 준 온유와 온유 오빠를 바라보는 시선을 떠올리면 된다. “그들도 피해자야”). 우리 중에 나한교가 아니었던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박 기자와 같은 생각을 해보지 않았던 사람이 몇이나 될까? 어쩌면 박 기자는 용감한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무속적인 믿음으로 마치 우리들이 기독교의 수호자인양 과학의 합리적인 판단과 가치체계를 깡그리 무시하며, 중립적인 과학의 목소리를 사탄의 속임수와 동일시하며 귀를 틀어막고, 계속 어둠만을 쳐다보면서도 거룩한 척하며 지속하여 교회에 다니고 있진 않는가? 기정 사실화된 잘못된 편견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 제대로 된 창조주 하나님을 전하는 복음 전파가 가능하리라 생각하는가? 그 때야말로 당신이 제 2의, 제 3의 교주가 되는 순간 아니겠는가! 이런 부분을 잘 잡아낸 책 제목, "아론의 송아지"에서도 저자, 임택규가 이런 웃지 못할 상황에 대해서 얼마나 답답했으면 프롤로그에서부터 "우매함은 악보다 훨씬 위험하다"라는 디트리히 본회퍼의 문장으로 책을 시작하냔 말이다!


무크따가 생물학적 진화/창조론만을 다루는 데 그치지 않고 우주의 탄생까지도 함께 다룬다는 점에서 독자들은 이 책의 또 하나의 장점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즉, 무크따는 그 둘 모두를 매개로 하여 한 단계 위의 개념에 대한 편견을 깨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 같다. 이런 의미에서 무크따는 부제에 해당하는 과학과 신앙의 편견 깨기에 잘 부합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무크따는 자상하고 지혜로운 스승으로부터 일대일 과외를 받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러므로 이 책은 어떤 커다란 학회에 가서 정보를 수집하는 경쟁적인 방법보다, 자기가 잘 아는 선생님으로부터 개인적으로 친절하게 이것저것 물어보며 배우는 것을 선호하는 독자들에게 특히 권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게 되면 과학과 신앙을 더 이상 대립적으로 보지 않게 될 것이며, 저자처럼 과학과 신앙을 모두 겸하여 조화를 이루고, 또 서로를 더욱 발전/보완시켜주는 관계로 볼 수 있게 되리라 확신한다. 더불어, 탈기독교를 경험한 나한교들 중엔 이러한 편견으로부터의 해방이 아주 결정적으로 어필하는 케이스도 많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의 회심도 내심 기대해 본다. 박 기자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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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파괴력을 통제할  있는 인류의 도덕적 능력





신학자의 과학 산책
김기석 | 새물결플러스(2018)

 

이진호 (서울대학교 대학원 교육철학 전공)


누구에게나 그렇듯 과학이 이루어낸 업적은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피해 갈  없는 거대하고 시대적인 물결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과학을 부정하거나 또는 외면하며 살아간다. 과학의 시대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은 동시대의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수도,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도 없음은 차치하고서라도 먼저는  땅에서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삶을 온전하게 누리지도 못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신학자의 과학 산책(김기석, 2019, 새물결플러스)> 그리스도인들에게 과학에 대한 관심을 새롭게 자극하는 책이다. 근대의 위대한 철학자 칸트가 매일 아침 산책을 나서며 사색을 즐겼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산책이란 탐구 활동에 가장 유익한 활동 일지 모른다. 나아가 본격적으로 과학을 공부해보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과학을 산책한다는 것은 부담 없이 과학이란 세상에 발을 담가볼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그런 점에서 신학자가 과학 산책 나선다는 책의 제목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새로운사색과 통찰을 경험할  있을 것이란 설렘과 기대를 갖게 한다. 
 
저자는 책을 통해 과학이 본격적으로 태동한 시기부터 기독교가 과학과 소통해온 관점을 찬찬히 조명한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때로는 주제별로 시점을 옮겨가며 인간의 문명에 영향을 주었던 모든 과학적 논의에 신학적 관점을 얹어 설명한다. 특히  책은 한국의 평범한 기독교인들보다 먼저 과학과 신앙 사이를 고민했던 저자의 관점이 제시되어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한  안내가  것이다(저자가 신학자라는 것은 그런 점에서 책의 내용에 대한 신앙적 관점을 보증해준다). 저자는 주로 신학의  원칙 위에서 과학의 성과를 하나하나 짚어가고  해석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저자가 주로 취하는 관점은 과학의 발견과 성취를 존중하고 받아들이면서도,  안에서 새롭게 던져지는 신학적 질문 그리고 신앙인으로서의 숙제를 기꺼이 받아들인다. 
 
책의 내용 전반에 걸쳐 우주와 창조, 생명과학, 물리학  다양한 기초과학 분야에 관한 내용뿐만 아니라 현대 과학의 첨단인 공학, 특히 다가오는 4 산업혁명과 관련된 인공지능 이야기에도 많은 부분을 할애했다.  주제의 과학적인 내용을 문외한인 대중이 쉽게 이해할  있도록 내용을 소개하는 것은 물론이고(아마 저자 역시 우리와 같은 과학의 아마추어라는 점이  부분에서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중간중간 과학적인 설명에 신학자로서의 기독교적 함의를 보태어 독자들로 하여금 신앙의 지평을 넓힐  있도록 도움을 준다.
 
저자가 제시한 통찰을   소개해보면 먼저 빛과 태양 그리고 지구의 공전을 통한 계절의 형성을 설명하면서 우리에게 신앙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태양과의 거리는  멀지만 태양을 향한 각도가 보다 수직에 가깝기 때문에 온도가 올라가게 되는데, 여기서 거리보다는 각도가 중요함을   있다. 어쩌면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도 이와 비슷할지 모른다. 하나님과의 거리보다는 그분을 향한 열망이 보다 중요하지 않을까?” (87쪽)
 
저자는  뉴턴의 광학에 대한 내용 속에서
 
만일 밝은 투명한 빛이 하늘나라를 상징한다면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고방식처럼 혼합물이 전혀 없는 순수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무지개에서   있듯이 굴절률이 다른 여러 가지 단색광의 모여서 만들어진 결과다. 이를 사회적인 맥락으로 번역하자면 다양성의 공존이라고 말할  있을 것이다.  하늘나라의 찬란한 광채는 순수한 백색광이 아니라 무지개의 색깔이 함께 모여서 만드는 빛이다.” (91-92쪽)
 
라고 역설하며 우리 시대의 심각한 사회 문제인 차별과 억압, 그리고 소수자에 대한 문제를 기독교인들에게 환기시킨다.
 



과학의 원리를 신앙에 직접 적용하는 것은 당연히 학문에 대한 바른 태도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과학의 원리를 유비하여 우리 신앙에 새로운 통찰을 제시하는 것은 어쩌면 과학에 관심이 많은 신학자인 저자만이   있는 독특한 신앙의 스펙트럼이 아닐까?
 
이렇듯 저자는 책의 전반에 걸쳐 정말 과학을 산책하는 신학자로서의 본분을 다한다. 끊임없이 기독교인들에게 과학적 문제에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탐구할 것을 요청하는 것은 물론  안에서 던져지는 다양한 신앙의 도전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극복해나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때문에 <신학자의 과학 산책>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유익한 책이  것이다. 글의 도입부에서 언급했듯 우리는 이미 거스를  없는 과학적 물결 위에서 시대를 살아간다. 그리고 때로는 그런 과학적 성취가 우리의 신앙에  위협이 된다고 느낄지 모른다. 하지만 저자가 말하듯 겉보기에는 과학적 진리와 믿음의 진리가 서로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서로 통하는 하나의 진리(51)”임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나아가 단순히 과학과 신앙 사이에 균형 잡힌 시각을 갖추는 것뿐만 아니라 시대적 요구인 과학의 파괴력을 통제할  있는 인류의 도덕적 능력(318)” 기독교적 윤리관에서 찾아내고  그것을 통해 시대를 이끌어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있기를 바라고  노력해야  것이다.
 
우주 안에서 놀라운 성취를 이룩한 인간은 이제  능력에 걸맞은 영적 각성을 요청받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생명이 우주 안에 출현한 가장 소중한 존재라는 깨달음이다.” (2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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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조된 공동 창조자


[서평] 신학자의 과학 산책
김기석 | 새물결플러스(2018)

 

백우인 (과신대 교육/출판이사)




비가 참 많이 왔다. 비 오는 날 산책길에 내 손에 들린 책은  신학자의 과학 산책이다. 


창조와 끝에 관한 이야기는 언제나 설레고 기쁘다. 시작에 관한 이야기, 기원에 관한 이야기는 나와 너의 이야기와 우리의 이야기를 넘어 우주 전체에 관한 이야기이며 존재론과 인식론의 출발점이다. 끝에 관한 이야기는 분주하고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지구를 생각하고 인류를 생각하고 자연을 생각해보며 모두 샬롬을 누리는지 둘러보게 한다. 자연을 읽어내고 자연의 섭리를 이해하게 도와주는 과학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시는지를 어떻게 우주 만물을 다스리는지를 근사적으로 알게 해준다. 
  
오늘날과 앞으로 심각한 문제로 대두될 환경문제에 대해 가이아 가설을 소개하면서 저자는 생명들을 피조된 공동 창조자로 보는 신학적 세계관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와 정복을 반성하게 하고, 인간의 착취로 인해 파괴된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화해시키고 자연과 신의 관계를 화해시키게 하는 길도 발견할 것으로 기대한다. 
  
저자는 '우리 인류는 앞으로 언제까지 살아남을까?'라는 물음 앞에서 우리의 후손들이 먼 미래에도 살아남기 위해서는 발달하는 과학에 상응하여 반드시 지녀야 할 능력으로 과학의 파괴력을 통제할 수 있는 인류의 도덕적 능력, 즉 타자와 공존하고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도덕적 능력과 지혜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과학이 지배하는 21세기에도 사랑과 희생의 삶을 보여주고 실천하는 기독교가 여전히 필요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일어나 봐 밖에 비 와” 는 동생을 깨워 노란 비옷을 입고 함께 밖으로 나갔지요. 뭔가 재미있는 일이 생길 것 같았지요. 저 멀리 나무 위에 작은 구름 한 조각이 눈에 띄었어요. 우리는 그 작고 가벼운 구름이 날아가지 않도록 조심조심 안고 엄마한테 갖다 주었지요. 엄마는 구름으로 빵을 만들어주었어요.
  
상상력을 자극하고, 사랑을 느낄 수 있는 따뜻한 내용이 담겨있고, 다양한 소재와 배경이 그림으로 되어있는 구름 빵은 동화책인데도 여러 번 손이 가는 책이었다. 특히 동생을 깨우는 는 다정하고 호기심 많은 게다가 이야기를 재미나게 해줄 것 같은 인물로 다가왔다. 필자는 신학자의 과학 산책에서 동생에게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재미나게 얘기해주는 를 만났다


21세기 과학기술의 시대에서 호모 데우스를 꿈꾸는 우리 사피엔스에게 “일어나 봐” 우리의 손을 잡고 역사 안에서 종교와 과학의 관계가 적인지 동지인지를 다루는 것을 시작으로 차근차근 과학의 발달에 따른 주제들-상대성 이론, 양자역학, 빅뱅, 인공지능, 생태신학-을 신학적 통찰과 함께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저자 김기석! 구름조각들을 모아 다른 재료들과 함께 구름빵을 만들 듯 다양한 주제들 속에서 신학적 의미를 숙고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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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View Vol.16 / 20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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