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신대 북클럽 이야기 | 서울 남부 북클럽]




진화는 왜 사실인가

제리 코인, <지울 수 없는 흔적> (을유문화사, 2011)


우종학 (과신대 대표)


* 이 글은 우종학 교수님 페이스북 담벼락에서 가져왔습니다. 


세 분이 새로 오셔서 활기가 더해졌습니다. 북클럽 카톡방에는 30명이 넘는 분들이 있는데 거쳐가신 분들도 있고 꾸준히 나오는 분들도 있습니다. 오늘 끝날 때 한 분이 이야기하길, 3년 넘게 책을 읽고 공부하면서 점점 겸손하게 된다고 합니다.


제리 코인의 [지울 수 없는 흔적]의 전반부 1-4장을 읽고 나누었습니다. 다들 과학책이 너무 재미있답니다. 쉽게 논리적으로 쓴 저자의 글솜씨도 있겠지만 진화에 관한 내용들을 따라 읽는 과정이 사실 흥미롭습니다.



1장은 진화란 무엇인가를 다룹니다. 6개의 키워드가 나옵니다. 1) 진화 2) 점진주의 3) 종의 분화 4) 공통조상 5) 자연선택 6) 자연선택이 아닌 다른 진화의 기작. 이 개념들을 각각 설명하는 책의 도입부입니다.


진화는 유전자 변이를 통해 긴 시간 동안 종이 변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그것이 매우 길게 점진적으로 쌓이면 공통조상에서 종이 분화합니다. 그렇게 분화시키는 힘이 자연선택을 비롯한 몇 가지 메커니즘입니다.


2,3,4장은 진화의 증거를 다룹니다. 화석의 증거, 흔적기관과 배아, 그리고 생물지리학의 내용이 각각 흥미롭게 펼쳐집니다. 다윈이 종의 기원을 쓰던 시절에는 화석의 기록이 변변치 않았고 주로 생물지리학에서 영감을 받았지만 한 세기 반이 지난 지금 화석의 증거는 매우 강력합니다.


우리들이 중고 시절에 생물학을 배웠을 때와도 다르게 전이 화석들도 많이 발견되었습니다. 특히 어류와 양서류의 출현시기 사이에 해당하는 지층을 뒤져서 찾은 전이 화석은 유명한 일화입니다. 시간에 따라 종의 변화를 보여주는 화석의 기록을 보면 바로 지울 수 없는 흔적이라는 책 제목이 연상됩니다.


흔적기관들과 배아도 강력한 증거입니다. 인간도 뱃속에서 열 달을 지내는 동안 어류, 양서류, 파충류의 배아의 모습을 거쳐갑니다. 참 신기한 일입니다. 진화는 새로운 것을 뚝딱 만들어내는 일이 아니라 옛것을 고쳐서 새롭게 만드는 일이니 우리 몸의 DNA는 옛 조상의 정보들을 상당히 많이 갖고 있습니다.


그래도 어떻게 인간의 배아의 모습이 그동안 거쳐간 진화 과정을 거치며 변하는지 신기할 따름입니다. 왜 그런지 밝혀지지 않았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진화의 과정을 통해서 창조했음을 알려주기 위해서 신이 일부러 보여주는 계시일지도 모릅니다. ^^



생물지리학은 참으로 강력한 증거입니다. 하와이나 갈라파고스 같은 대양 섬들에는 대륙에 사는 포유류, 양서류, 파충류들이 거의 없습니다. 반대로 대양 섬에 존재하는 동식물은 주로 가까운 대륙 연안에 분포하는 동식물과 비슷합니다. 이것은 대양 섬에서 격리된 채로 진화가 일어났음을 잘 보여줍니다. 다윈이 영감을 얻은 것도 바로 이 점이었지요.


화석의 증거, 흔적기관, 생물지리학 이렇게 3가지로 증거를 제시하지만 아쉬운 점은 유전자 정보를 다루지 않았다는 겁니다. 종과 종의 유사성과 분화 과정을 정량적으로 추적할 수 있는 강력한 도구인 유전자 유사성의 증거가 책에는 별로 다뤄지지 않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은 2009년에 출판되었고 그때는 겨우 인간 게놈의 지도가 완성되던 시절입니다. 물론 지금은 맞춤형으로 한 개인의 유전지도를 분석해서 얻을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비용이 백만 원이고 미국에서는 몇십 불짜리 키트도 있다죠. 10년 동안 게놈 분석이 엄청나게 발전했다는 말입니다. 동물들도 유전자 분석을 통해 진화 과정을 추적할 수 있게 되었죠. 하지만 10년 전에는 그런 정보가 별로 없었을 테니 이 책에는 그 내용이 별로 없습니다. 아쉬운 점입니다.


전반부를 읽고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저자는 창조론이 틀렸다며 계속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물론 저자가 말하는 창조론은 즉각적 창조론입니다. 생물들을 따로따로 설계해서 즉각적으로 만들었다는 창조과학과 지적설계의 입장을 깝니다.



왜 많은 교인들이 즉각적 창조와 진화적 창조 중에서 즉각적 창조를 선호할까라는 질문에 몇 가지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1. 우선 성경이 즉각적 창조를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입니다. 물론 성경해석의 문제입니다. 성경은 진화적 창조를 배제하거나 즉각적 창조만이 옳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지는 않습니다.


2. 성경은 오히려 즉각적으로 일하시기 보다 긴 과정을 거쳐 사람들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애굽으로 내려간 야곱의 가족을 200만 명으로 즉각적으로 만들 수도 있지만 하나님은 인간들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역사를 만들어내도록 400년을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은 인간과 협력하여 역사를 섭리하십니다.


3.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다양한 생물종들을 즉각적으로 만드는 대신에 긴 과정을 거쳐서 필연과 우연을 거치면서 유전자 변이와 종의 분화가 일어나도록 자연에 자율성을 줍니다. 하나님은 자연과 협력하여 창조 과정을 섭리합니다.


4. 하지만 우리 인간은 즉각적인 하나님을 좋아합니다. 수능시험을 앞두고 시험을 잘 보게 해주시는 그런 하나님을 원합니다. 내 욕망과 욕심을 채워주시는 그런 기적적인 하나님을 선호합니다.


5. 그러니 즉각적 창조를 진화적 창조보다 더 선호합니다.



6. 물론 이는 우리가 바라는 하나님의 모습이며 우리가 만들어 낸 하나님의 모습일 뿐입니다. 성경에서 제시하는 하나님은 그렇게 알라딘 램프의 지니처럼 우리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즉각적으로 일하지 않습니다.


7. 더군다나 진화적 창조는 왠지 인간의 위상을 떨어트리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인간을 창조해야 인간이 특별해질 듯합니다. 참 이상한 심리이지요. 인류가 기적적으로 창조되었더라도 나는 기적적으로 창조된 것이 아닌 게 분명한데 말입니다. 아담은 모르겠지만 나는 정자와 난자의 수정을 통해 세포분열 과정을 통해 창조되었으니까요. 내가 그런 방법으로 창조되었다고 해서 존엄하지 못한 존재가 되는 건 아닙니다. 아담도 마찬가지입니다.


8. 즉각적 창조는 하나님이 뭔가 일하시는 것 같지만 진화적 창조는 약간 이신론 같다는 거부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무것도 안 하고 자연이 스스로 진화를 시켜낸다는 그런 오해 말입니다.


9. 하지만 근대과학 이후에 이런 이신론적 느낌은 계속 있어왔습니다. 물리학에서는 뉴턴이 중력으로 천체들의 운동을 설명했고 마치 하나님 없이 별과 행성들이 운동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물리학은 다 받아들입니다. 물리학은 이미 포기했으니 생물학이라도 붙들자는 말일까요?


10. 사실 진화가 일어나는 과정, 그 우연의 과정을 통해 우리 인간이 출현했다는 것은 믿기지 않을 만큼놀라운 일입니다. 유전자 변이가 무작위적으로 일어나고 진화가 방향성 없이 흘러온 것 같지만 그 모든 과정은 신의 역사요 섭리요 계획이었던 것입니다.


11. 즉각적 창조가 맞나 진화적 창조가 맞나 하는 문제는 물론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진화적 창조를 받아들이면 많은 것이 변합니다.


11.1 우선 하나님에 대한 시각이 바뀝니다. 천지를 뚝딱 창조한 분이 아니라 오래 참음과 자기를 비움으로 그리고 자연에 자율성을 부여하여 공들여 창조한 분입니다. 마치 10달 동안 뱃속에서 자라는 아기를 태교하며 마침내 출산을 통해 아기를 낳는 어머니처럼 하나님은 천지를 그렇게 보듬어 창조하셨습니다.


11.2 인간에 대한 시각도 바뀝니다. 인간은 생물학적으로는 그리 특별한 존재가 아니지만 그런 인간을 하나님은 특별한 존재로 삼으셨고 하나님과 같은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촘촘하게 미리 짜두신 계획을 어떻게든 알아내어야 하는, 마치 미로찾기 임무가 주어진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신 자유의지를 가지고 마음껏 창조하고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는 존재입니다.


11.3 자연에 대한 시각도 바뀝니다. 인간은 만물을 파괴할 권리를 가진 폭군이 아니라 창조계의 한 구성원으로 함께 지음 받은 가족입니다. 창조세계를 보존하고 지킬 의무를 갖고 있습니다.


11.4 성경에 대한 시각도 바뀝니다. 문자적으로 성경을 읽고 성경의 표현 안에 하나님을 가두어 두기보다는 나의 성경해석이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하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을 물어가게 됩니다. 도그마적인 태도를 버리고 인간의 언어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크심과 놀라우심을 묵상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과학도 공부하고 성경도 공부하고 신학도 공부해야 합니다. 그래서 과신대 북클럽에도 참석해야 합니다.^^ 한국교회의 문제는 성숙하지 못하다는 점입니다. 한국교회가 성숙하려면 바로 내가 성숙해져야 합니다.



12월 모임 안내

* 모임 일시: 12월 11일(화) 저녁 7시
* 모임 장소: 더처치 비전센터 6층 세미나실 (서울 관악구 쑥고개로 122)
* 읽어 올 내용: 제리 코인, <지울 수 없는 흔적>, 5~9장
* 문의: 070-4320-2123, scitheo.offic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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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북클럽 이야기 | 수원 북클럽]



상쾌한 아침 공기와 함께 드디어 오늘 수원남부 북클럽이 시작되었습니다. ^^
환영 안내지를 미리 준비해 주신 성공회 제자교회 김진세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감동했습니다. 별 것 아닌데 왜 이리 고마운지.... ㅎ~


첫 모임이니 만큼 각자 소개 시간을 가졌습니다. 인격적으로 존경할 만한 목사님이 있는 곳에 다녔으나 세월호 사고를 대하는 교회의 태도에 실망한 나머지 가나안 신자가 된 분도 오셨습니다. 왜 아니겠습니까? 2017년 4월 16일은 게다가 부활주일이었는데 그 아픔에 전혀 공감하지 않는 예배 내용에 실망했던 저의 기억도 소환되었습니다.



무크따(무신론 기자, 크리스천 과학자에게 따지다) 1~4장을 통해 과학과 신앙의 관계에 대해서 다루었습니다. 과학과 신앙에 대해 갖고 있던 오해들을 하나 하나 해체하고 정리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기적을 일으키는 하나님. 그런 하나님에 의존하는 신앙은 과학주의에 기반한 무신론의 공격에 취약합니다. 신앙인 스스로 하나님의 영역(전염병, 낙뢰, 태풍 같은)을 축소하여 버린 결과죠.


아이가 파란 하늘을 가리키며 저 하늘에 천사가 있고 하나님도 계시냐고 묻는다면 오늘의 정상적인 기독교인 신자라면 누구도 하나님이 저 구름 너머 혹은 안드로메다 은하 너머 어딘가에 있다고 답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비행기가 날고 구름이 떠 있는 '하늘'과 신앙의 '하늘'을 구별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으로서 가장 어려워하는 진화에 대해서도 우리는 '진화, 진화론, 진화주의' 이 3가지를 구분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침 우리 모임에는 진화학 석사와 면역학 박사 학위를 갖고 있는 루터교 오세조 목사님(팔복 루터교회)이 함께 하십니다. 진화는 지금도 관찰되는 자연 현상이며 이것을 연구하는 학문이 진화론, 생명과학이겠고 이런 과학이론에 기반해 무신론적 해석을 하는 태도를 진화주의라 하겠습니다.



과학과 신앙의 관계를 통합론의 관점으로 보는 창조과학과 무신론자들이 상정한 신은 '틈새의 신'에 지나지 않고 이 신을 놓고 벌이는 줄다리기는 아무리 봐도 과학으로 무장한 무신론자의 승리로 결론이 날 것 같습니다. 유사과학으로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요?


비록 실재의 한 파편에 불과할지라도 하나님을 엉뚱하게 이해하고 이웃에게 그릇 행하는 과오는 피하고 싶습니다. 과신대 북클럽이 그런 면에서 분명히 도움이 될 것입니다. 늦지 않게 수원 남부 북클럽에 합류하실 것을 권해 드립니다. 누구든 오실 수 있습니다.



* 모임 장소: 성공회 제자 교회(http://agnes.or.kr경기도 오산시 세남로14번길 25, 대한성공회 오산 세마대 제자교회
* 다음 북클럽 일정: 2018년 12월 15일(토)
* 문의: 070-4320-2123, scitheo.offic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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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북클럽 이야기 | 분당/판교 북클럽]




김근주, 『나를 넘어서는 성경 읽기』(성서유니온, 2017)


조중식



후기의 문을 열기 전에 먼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새로 합류하신 최윤희 선생님의 인사 말씀을 제대로 듣지 못하고 황급히 자리를 뜨게 되어 무척 죄송했습니다. 변명 같지만 이래서 환영 인사 및 자기소개는 모임 초반에 하는 것이 정석입니다. 장장 11페이지에 걸쳐 발제문을 써 오신 정훈재 선생님의 노고에 합당한 대우를 해 드리기 위해 멤버들 마음이 다들 급했나 봅니다. 앞으로는 발제문 분량을 최대 5페이지로 제한하고, 이를 초과할 시 모임에서 강퇴시키는 규정을 만듭시다(썰렁했다면 죄송합니다).


“성경을 읽을 때 주의하지 않으면, 진
리를 전달하는 매개를 진리 자체와 혼동해 버리기 쉽고
그때 마다 교회는 세상의 빛은 커녕
세상의 화근으로 전락하곤 했다.”


성경 좀 읽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자신의 읽기 방식(그런 것을 나름 정리해서 ‘내 읽기 방식은 이런 것이다’라고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에 대해 별다른 문제의식이 없는 것 같습니다. 물론 저는 이 부류에 속하지 않습니다. 우선 성경을 많이 안 읽었고(꾸준히 읽으려고 시도를 안 해 본 것은 아닙니다만), 여전히 성경에 대해 아는 것 보다 모르는 것이 많기 때문이죠. 그런데 김근주 교수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한국 교회는 오히려 성경을 지나치게 많이, 그리고 무비판적으로 암기 하듯 머릿속에 집어넣는 일에만 매달리고 있어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성경이 무슨 책이냐고 물으면 열에 아홉은 간단히 ‘하느님의 말씀’ 이라고 답할 테지만, 정작 하느님께서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느냐고 재차 묻는다면 어떤 대답을 듣게 될까요?


솔직히 저도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대답이랍시고 불필요한 말들을 지루하게 늘어놓았을 테지요. 하지만 이제는 다음과 같이 간명하게 말 할 수 있어 기분이 매우 상쾌합니다.


“성경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려주는 책이다.”


책 제대로 안 읽고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을 구원해 주는 불법 복제 수준의 발제문은 ‘하느님을 아는 것이 성경읽기의 목적이다’,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인 동시에 사람의 글이다’, ‘비판적으로 읽기’에 이르기까지 거침없는 써머리를 제공하며 질주하다가, ‘성경 본문을 신학적으로 읽는다는 것의 의미’를 캐며 잠시 거친 숨을 골랐습니다. ‘공동체적 읽기’란 무엇인가?


제 기억에 최윤희 선생님께서 대강 “당신들 교회에서는 공동체적 성경읽기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셨던 것 같습니다. 이 대목에서의 ‘공동체적 읽기’는 분명 자신이 속한 교회 공동체 내에서의 성경 공부를 지칭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정도 범위의 ‘공동체적 읽기’가 ‘개인적 읽기’에 잠재된 위험으로부터 신자들을 보호하는 기능을 하기 어려울 때도 있으며, 이는 결국 ‘공동체의 범위’를 어디까지로 확장하느냐의 문제를 제기한다는 발언이 이어졌습니다(누가 했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많은 분들께서 이 주제에 대해 많은 유익한 말씀을 주셨습니다(자세한 기억은 없습니다). 저도 김란희 선생님처럼 속기사 수준의 현장 메모를 했다면 꼼꼼하게 다 적었을 텐데 말입니다. 아쉽네요.




여하튼 다시 박차를 가하기 시작한 발제문은 ‘역사에 나타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보는 대목에 이르러 온누리교회 문창극 장로를 소환합니다. “일제 강점기는 바빌론 유수가 그랬던 것처럼 ‘하느님의 뜻’이었나?” 이 물음 안에는 꽤 많은 지뢰, 부비트랩, 함정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대충 정리하고 논의의 초점을 모으는데 제법 긴 시간을 썼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문장로님 욕보셨습니다.


이어 신통방통한 발제문은 ‘성경 본문의 역사 : 본문의 배열과 편집이 본문 이해에 주는 의미’를 더듬고, ‘구약과 신약의 관계’를 2회로 나누어 집중 고찰한 후, ‘밭에 감추인 보화’를 찾기 위해 막판 스퍼트를 했는데, 이때부터 집에서 오는 긴급 호출 전화에 신경이 쓰여 솔직히 발제문 보다 시계를 더 많이 보았습니다. 후기 마무리가 김빠진 사이다처럼 된 건 순전히 제 불찰입니다.


심현준 선생님. 볼펜 주셔서 감사합니다. 왜 주실까 잠시 궁금했지만 귀찮아서 묻지 않았습니다. 석기병 선생님. 마지막까지 궁금하신 것이 많으신 듯 보였는데, 제가 본의 아니게 흐름을 끊은 것 아닌가 싶어 죄송한 마음이었습니다. 짜증 안 나셨죠? 이미선 선생님. 지난번 모임 때 교회에 아이를 데려와 놀려도 되냐고 물으시더니 이번에도 혼자 오셨네요. 박철성 선생님. “사진 잘 봤습니다. 분위기도 훈훈해보이고...” 라니요? 어제 오신 분은 쌍둥이 형제분이신가요? 김자현 선생님. 저는 비록 일찍 자리를 떠 듣지 못했지만, 모임 말미에 깊이 있는 한 말씀 저희에게 들려주시고 가셨으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강사무엘님. 끝까지 뒷정리를 함께 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하여간 일복은 진짜 타고나신 분입니다. 마지막으로 프란시스님... 땡큐.



12월부터는 김근주 교수님의 『복음의 공공성』으로 3개월 간 모임을 진행합니다. 


<분당/판교 북클럽 12월 모임 안내>
일시 : 12월 11일(화) 저녁 7:30
장소 : 성공회 분당교회
책 : 복음의 공공성(김근주)
북클럽지기 : 강사은(overfros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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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북클럽 이야기 | 인천/부천 북클럽]




10월 16일(화) 서울신학대학교에서

인천/부천 과신대 북클럽 모임을 가졌습니다. 

지난 달에 이어서

이번에도 박영식 교수님의

<창조의 신학>으로 진행했습니다. 


각자 2장, 4장, 6장을 읽어오고

질문을 3개씩 만들어 오도록 했는데,

정작 2장에 대한 토론이 길어져서

4장, 6장은 시작도 못했습니다. 



북클럽에 참석하신 분들이

모두 책을 열심히 읽어와서 그런지

질문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형상과

죽음 이후의 몸의 부활에 대한

토론이 활발했습니다. 


기존에 우리가 교회에서 흔히

들었던 내용도 아니고

상당히 낯설고 새로운 내용이라 그런지

모두들 충격을 받은 눈치였습니다. 


하지만 박영식 교수님께서

학생들의 질문을 잘 경청해 주시고

열정적으로 설명해 주셔서

은혜롭게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



매주 교수님께서 각각 종류대로

맛있는 간식도 준비해 주시고

학생들과 편하게 이야기를 해 주십니다.

앞으로의 모임도 기대가 됩니다. 


다음달 모임은 서울신대 신학과 학생회와

과신대가 콜라보로 진행하는

과신톡으로 대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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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자와 과학자의 유쾌한 대화로 풀어가는 과신톡]

http://scitheo.tistory.com/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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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북클럽 이야기 | 파사데나 북클럽]




벽을 넘어서 | 김영웅 (파사데나 북클럽 회원)



과거엔 많은 것들이 밝혀지지 않았을 뿐더러 그것들을 밝힐만한 지식과 기술이 부재했다. 문명의 발달은 이를 가능케 해주었다. 그로 인해 인간의 호기심은 상당 부분 해소되었고, 미신적인 믿음 또한 점차 사라져갔다. 과학으로 설명하거나 증명할 수 있는 범위 내에 많은 것들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역사를 거치며, 과거의 몇몇 천재들이 착상해낸 가설이 시대를 앞선 과학적 사실로 증명되기도 하고, 이와 반대로 여러 관측과 실험을 통하여 그 가설이 그저 상상력의 발현으로만 남게된 경우도 있다. 많은 천재들의 직관도 시대를 뛰어넘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리는 이유는 전세계에 흩어진 수많은 과학자들에 의해서 검증과정이 수도 없이 독립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과학에서 한 이론이 정립되기까지는 이렇듯 끝없는 자정과정이 수반된다. 그리고 이는 과학의 숨은 힘이자 과학을 신뢰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이런 과학적인 증명과 검증과정은 고대 근동 지방에 살던 사람들의 세계관과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세계관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들에 의해서 기록된 성경도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성령의 감동에 의해 성경이 씌여졌다고 믿는 건 결코 성령이 불러주는 것을 그대로 받아썼다고 보는 축자영감설을 의미하진 않는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세계관을 그대로 반영한다. 많은 것들이 밝혀지지 않았고 그것들을 밝힐만한 지식과 기술이 부재했던 그 시대 말이다. 그러므로 성경이란 텍스트 안에도 문명의 발달로 인해 과학적인 사실로 밝혀진 많은 것들에 의해서 재이해되어야 할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런 오류라고도 할 수 없는 (의도적이 아니라 한계였기 때문에) 오류를 찾아낸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사라져버리거나 성경이 거짓신의 장난으로 둔갑하지는 않는다. 믿음과 신앙이라는 것은 과학으로 증명할 수 있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며, 이미 믿음과 신앙을 가진 사람들조차 그런 세세한 오류들을 다 솎아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믿음과 신앙은 이해를 동반하지만, 이해했다고 해서 믿음과 신앙을 가질 수 있는 건 아니다. 그건 그야말로 신비다. 믿는 자들은 이를 은혜라고 표현한다.



방식은 의미를 대체할 수 없다. 의미를 방식 안에 가둘 때 오류와 갈등이 생겨나는 건 피할 수 없다. 창조주 하나님을 문자 안에 가두는 행위를 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오지 않자 불안해진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론을 부추겨 금송아지 형상을 만들어 하나님이라 칭했던 행위에 비유한, ‘아론의 송아지’의 저자, 임택규 (Taeck Kyu Yim) 선생님의 저자직강이 어제 파사데나 과신대 모임에서 있었다. 12명이 참석했던 어제 저녁, 모임 자리를 흔쾌히 내주신 파사데나 장로교회의 담임 이동우 (Dongwoo Lee) 목사님의 배려로 진지하고 깊은 대화가 2시간이 넘도록 오갔다. 1시간 가량 진행된 임택규 선생님의 몰입할 수밖에 없는 강의는 과학이 무엇인지 과학적인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이 주를 이루었는데, 이는 알다시피 유사과학을 넌지시 배격하기 위함이었다. 힉스 입자에 대한 장황한 설명조차 과학자인 나에게도 과학적 방법과 과정에 대한 경이감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반대급부로 유사과학이 더욱 터무니없는 장난으로 자연스럽게 여겨졌음은 당연한 결론이었다. 강의는 과학자인 나같은 참석자보단 과학을 업으로 하지 않는 참석자들에게 더 큰 유익이 있었던 명강이었다 (임택규 선생님은 진짜 가르치는 선생 역할이 너무 잘 어울리신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 모임엔 창조과학이란 이름을 스스로 사용하는 유사과학자들을 지지하거나 옹호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하지만 이 말은 모두가 유신 진화론자라는 걸 의미하지도 않는다. 편을 가르고 적을 배격하는 방식은 이 모임이 추구하는 바가 아니다. 과학과 신학의 대화의 지향점은 결국 모두가 불필요한 다툼없이 서로의 관점을 (합리적이어야 한다는 전제가 붙겠지만) 인정하고 함께 하나님의 창조하심과 기독교의 기본 교리들을 좀 더 풍성하게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어야 한다고 본다. 이것은 창조과학자들의 비합리성을 부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건 아니다. 비합리성을 부수다가 인간을 부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비합리성은 그들의 내면 깊숙한 어딘가에 뿌리내려 결코 칼로 말끔히 그곳만을 도려낼 수 없다. 끈끈히 연결되어있다. 만약 과학과 신학의 대화가 인간을 부수게 된다면 배는 산으로 가게 될 것이다. 이 대화 역시 죽이고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살리는 것이어야 한다.


‘벽’이라는 얘기가 나왔다. ‘의도적 거절’이란 용어와 연결되었다. 창조과학자들의 숨은 입장을 잘 대변해주는 말인 것 같았다. 그리고 그들의 한계를 좀 더 사실적으로 느낄 수 있었고, 측은한 생각까지 들었다. 난 이 부분에 좀 더 많은 토의가 진행되어야 한다고 본다. 왜냐하면, 창조과학자들과의 대화가 어느 선에서 멈춰버려 더 이상 진행되지 않을 때가 많은데, 그것은 그들이 더 이상 합리적인 논리가 침투하지 못하도록 그들 스스로 본능적으로 쳐버린 벽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그 너머의 세계는 절대 외부로부터의 과학적이고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방법으로는 무너뜨릴 수가 없다. 오히려 개인적인 신앙의 이면과 숨겨졌거나 감춘 과거의 경험과 연결이 되어 있다. 이 영역은 다분히 감정적일 수도 있는데, 그것은 그 영역에서 영육간의 유익을 얻어왔고 자신이 진리라고 믿어왔던 것들이 한꺼번에 붕괴될 수 있는 어떤 선을 지나치는듯한 느낌을 받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과학과 신학의 대화는 과학적인 방식을 넘어서 이러한 영역까지도 다룰 수 있는 어떤 해결안이 모색되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창조과학자들이 아무런 과학적 근거없이 유신진화론자들이 내놓은 과학적 사실에 흠집을 내곤 하는데, 그것에 반하여 우리가 그들을 공격하는 것에 그친다면 결국 대화는 공격 무기밖엔 되지 않을 것이다. 과학과 신학의 대화는 단순한 창조과학 해체가 아닌 그것을 넘어서는 바른 신앙을 갖기 위한 바른 성경해석을 지향해야 할 것이다. 즉 많은 것들이 기존에 믿어왔던 것들과 다르다는 것을 밝히는 것에 (이를테면 어떤 성경의 사건이 허구라고 밝혀지던지...) 우리의 목적이 있지 않다. 중요한 건, 그런 오류를 발견해내고 사실을 밝혀내어 미신적인 믿음을 깨부수고 난 이후, 그럼 과연 어떻게 그 부분의 성경을 하나님의 경륜에 어긋나지 않게 해석해야하느냐일 것이다. 이런 면에서 어찌보면 후반으로 갈수록 과학자들보단 신학자와 목회자들의 어깨가 무거워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주어지리란 예측을 할 수 있겠다.


기독교를 변호하고 수호하려는 창조과학자들의 초기 의도와는 달리 그들이 결국 이뤄낸 것은 과학과 신학 사이의 큰 간극이다. 안타깝지만 이미 그건 역사가 되었다. 그들이 벌려놓은 간극을 메우기 위하여 과학자들과 신학자들이 대화를 하기 시작했고 이 움직임 가운데 우리 모임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다시 한 번 임택규 선생님께 감사드리고, 모인 참석자 모두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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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북클럽 이야기 | 전주 북클럽]





| 김재상 (전주 북클럽 회원)



7장 의미 추구와 과학의 한계


7장에서 알리스터 맥그라스는 앞에서 논의해왔던 작은 결론을 적고 있다. 기독 신앙과 의미라는 맥락에서 과학과 기독신앙의 대화에 대한 한 꼭지를 마무리하고 있다. <우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를 시작하면서, 맥그라스는 과학과 기독교의 전쟁/갈등 서사는 두 진영의 본질적 관계를 드러내지 못한다고 보았다. 도리어 그는 기독신앙의 서사와 과학의 서사가 함께 할 때 우주 실재가 지니고 있는 풍성한 의미들이 드러난다고 보았다. 


실재는 한 측면이나 한 관점에서만 읽히지 않는다. 실재는 다양한 측면이나 층위에서 여러 의미를 보인다. 실재에 대한 건전한 이해는 여러 관점에서 찾을 수 있는 다양한 의미를 종합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맥그라스는 이러한 비판적 실재론을 근간으로 하여, 실재에 대한 과학과 기독교 각각의 설명이 지니고 있는 의미들을 조화시키고자 한다. 그래서 그는 4장에서 우주, 5장에서 다윈 진화론, 6장에서는 인간 본성에 대해 과학과 기독교가 지닌 다양한 의미들을 제시하며 그 의미 가운데 과학과 기독교의 만남이 지닌 의의를 적었다. 그리고 7장에서는 작은 결론을 내리고 있다.


알리스터 맥그라스에 따르면, 인간은 궁극적 질문을 던지는 존재이다. 그 질문에 대한 답 가운데서 실재의 의미를 발견해간다. 그 의미들은 삶에 가치를 부여하며 생존의지를 불러일으킨다. 실재에 대한 의미를 품고 있는 답을 기독교만이 주지는 않는다. 과학 역시 줄 수 있다. 그런데 우주를 탐구하며 의미를 주는 과학은 결코 전체 그림을 볼 수 없다는 점이다. 맥그라스는 마치 전체 그림을 보는 듯이 의미가 담긴 답을 하려는, 왜곡된 과학을 과학제국주의라고 하고 있다. 과학제국주의는 수정이 가능한 우연적 참인 특정 과학 이론이나 체계를 필연적이며 보편적 참으로 확장시키는 우를 범한다. 그리고 형이상학적이며 초월적인 주장이나 신념을 방법론상으로 제거하는 과학제국주의가 실재에 대한 건전한 의미를 준다는 것은 만무하다. 


맥그라스는 과학제국주의를 거부하는 과학이 기독신앙과 함께 상호보완하며 실재에 대한 의미를 풍성히 제시할 수 있다고 보았다. 과학은 인간에 대해 물리학, 유전학, 생리학 설명을 제공한다. 인간의 몸, 기관, 조직, 세포, 유전자 등의 기능과 형성에 대한 설명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들만으로 인간의 정체성이나 본성을 우리는 알 수 없다. 인생의 의미를 다 파악할 수 없다. 기독신앙이 드러내는 인생의 조명이 여기에 필요하다. 삶에 대한 신의 계시와 섭리에 대한 이해와 과학이 주는 설명이 서로 씨줄과 날줄이 되어 인생의 의미를 엮어간다. 과학이 그림의 일부를 세밀히 설명해준다면, 기독신앙은 그림의 큰 틀을 보여준다. 


생각해볼 점


* 알리스터 맥그라스는 과학이 그림의 부분을 설명한다면 종교는 전체 그림을 설명한다고 비유하고 있다. 어떤 점에서 종교가 전체 그림을 설명한다고 보아야 하는가? 종교도 전체 그림의 작은 퍼즐들을 제공한다고 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종교는 계시 그 자체가 아니다. 계시에 대한 해석 결과가 종교를 형성한다. 그리고 계시가 온전한 그림 전체를 보여준다 하더라도 그 계시에 대한 인간의 인식과 해석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기에 우주 실재가 지닌 의미를 파악해 가는 데에는, 과학만으로 종교만으로는 부족하다. 과학과 종교가 제시하는 의미의 지도를 함께 모아갈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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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북클럽 이야기 | 분당/판교]


| 김란희 (분당/판교 북클럽 회원)



가을이 무르익어 가는 시월의 어느 날 밤 분당/판교에 눈빛 형형한 독서쟁이들이 모였습니다.

반가운 a new-face가 오셔서 우리는 오늘도 첫 만남처럼 각자를 재미나게 소개하면서 독서모임을 시작했습니다.


저는 화학을 전공했고 기병대를 생각하시면 기억이 날 겁니다. 기독교 변증에 대한 관심이 여기까지 오게 된 동기가 되었습니다.

저도 공학을 전공했습니다. 교회 주일학교에서 청소년들을 가르치는데 그들의 질문에 정직하고 정확하게 답해 주고 싶어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전 칠성 사이다를 생각해주세요.

전 동네사람인데 동네에 있는 유일한 독서모임이고 목사 후보생으로 신학을 위한 지성의 깊이를 더하고 싶어 오게 되었습니다. 못난이로 기억해주세요.

공학박사로 연구원으로 있고 주중 느헤미야 강의로 큰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성경의 깊은 의미를 깨닫고 싶다는 열정이 느헤미야를 알게 했고, 그 앎으로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저도 컴퓨터 공학을 했고 과학적 사고가 강한 안티 크리스찬인 남편에게 기독교를 제대로 알려 주고 싶어왔습니다. 알리스터 맥그라스 책을 인상 깊게 읽던 중 마침 그 분의 책으로 독서모임을 한다고 해서 한달음에 왔습니다.

저는 과신대 분당판교 부지기로 방금 임명 받은 정통 인문학을 공부한 철학적 사유자입니다. 이 바닥에 많이 계시다는 박사는 아니지만 향학열은 높아 이것저것에 관심이 많아 앎을 위한 주파수를 세우던 중 지기님과 신부님의 소개로 과신대를 소개받아 이렇게 오게 되었습니다. 교회에서 성공회로 또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은 신의 섭리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잘못된 인식의 외피를 걷어내는 귀한 시간이 되고 있습니다.

저도 공학을 전공한 프로그래머로 북카페 지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상은 오늘 참석한 6인의 자기 소개였습니다. 전체 멤머 15인.



오늘은 알리스터 맥그라스의 <인간, Great Mystery>를 석기병 님의 발제로 모임을 가졌습니다.


저자는 ‘인간이란 본질적 특성으로, 의미를 추구하는 동물로서, 생의 의미에 대한 의문을 탐색한다.’로 인간에 대한 간략한 정의와 함께, 심리학의 경험적 연구를 동원하여 ‘인간은 자신보다 더 큰 무언가의 한 부분이라 느끼게 해주는 Big Picture('큰 그림')을 갈망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길 위의 존재로서 삶의 의미를 추구하고, 세상과 삶을 이해하기 위해 과학을 하지만, 자신과 세상을 실제 모습 그대로 보려면 외적인 도움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신적 계시, 깨달음)이라고 합니다.


성령이 우리 마음의 눈을 열어주어야 비로소 세상은 우리에게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의 모양으로 우리 역사 세계에 들어오셔서 비로소 발코니가 아닌 길에서 우리 실존을 납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생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자연과학의 통찰을 받아들이되, 기독교 신학으로 인간 본질의 '큰 그림'을 통섭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객관적 설명과 주관적 체험, 지적 측면과 정서적 측면 사이의 균형을 잡아야 한다는 것이죠.


존 알렉산더 매케이는 “발코니와 길”이라는 유명한 비유를 통해 발코니는 ‘완벽한 관찰자’로 과학이고, 그에게 생과 우주는 영원한 연구와 숙고의 대상이나 발코니 아래 거리의 삶은 흥미를 갖고 바라보는 관찰대상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자는 발코니는 특권적 위치로서, 이 위치에서 우리는 발아래 광경을 바라보는 것으로 발코니는 하나님 시점을 제공한다는 것입니다. 길에서 보는 풍경은 보는 사람 자신이 몰두해 있는 풍경이나 우리는 그 여정의 참여자이며, 거기에 더하여 우리의 시야는 길에서 보이는 것들로 제한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그 제한적 관점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그 관점과 함께 움직이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여자 모두 가장 흥미로워 한 부분이라 길게 적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삶의 도정에 서 있기에 우리의 안목으로 볼 수 있는 삶의 진면목은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삶의 전체를 통찰할 수 있는 것은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의 시선으로 바라볼 때 가능한 것인데, 이 지점에 신앙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피조물이기에 창조주의 시선을 갖는다는 것은 성육신의 도움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저자의 지적이고, 그래서 우리는 성령의 내주를 그리도 갈구하게 되는가 봅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들의 독서 토론은 매우 활발했습니다. ‘길 위에 있는’ 우리가 발코니에 서 계신 하나님의 시선을 닮아 생에 대한 통찰력을 가져야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신앙인들은 저자가 말하는 “큰 그림을 찾는” 순례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기독적 관점으로 보았을 때 역사에 있어 ‘진보’란 무엇인가, 기독교의 ‘진보’는 어떤 개념인가 세속사의 ‘진보’와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죄’는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내재되어 있는 인간의 본질인가, 아니면 생존의 기재인가, 저자가 지지하고 있는 르네상스 시대 휴머니즘으로부터 교육을 통한 인간 변화론은 어떻게 볼 것인가까지 그 주제에 따라 묵직한 대화가 많이 촉발되었습니다. 진지하게 읽고 사색할수록 인간에 대한 탐구가 깊어지고 그만큼 하나님께도 다가갈 수 있는 책으로 10월 달 분당 독서모임은 또 한 번 책 선정의 “엄지 척”을 자랑하고 싶습니다. 후기는 발제 내용을 중심으로 적었습니다. 석기병 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11월은 김근주 교수님의 <나를 넘어서는 성경읽기>가 선정되었습니다. 많은 분들께 참여를 강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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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날씨가 너무 좋습니다. 

놀기도 좋고, 여행 가기도 좋은 날씨죠.

하지만 책 읽기도 좋은 날씨입니다. 


한 달에 한 번

마음껏 자신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과신대 북클럽에 

참여해 보는 건 어떨까요? 


전국 (아니 전 세계) 각 지역에서 

과신대 북클럽 모임이 

진행됩니다. 


* 혹시 아래 지역 외에 

새롭게 북클럽 모임을 

시작하고 싶은 분이 계시다면 

저희 사무국으로 

연락주세요. 

모임을 시작할 수 있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안양 북클럽 모임>

일시: 10월 12일(금) 저녁 7:30

장소: 범계 크리에이티브 카페

교재: 우종학, <과학시대의 도전과 기독교의 응답> 4, 5부

북클럽지기: 김고운 (jclovesme@nate.com)


<부천 북클럽 모임>

일시: 10월 16일(화) 저녁 7시

장소: 서울신학대학교 우석기념관 3층 교수라운지

교재: 박영식, <창조의 신학> 2, 4, 6장

북클럽지기: 최경환 (john9567@naver.com)


<관악 북클럽 모임>

일시: 10월 16일(화) 저녁 7:00

장소: 더처치 교회

교재: 알리스터 맥그라스, <인간, Great Mystery>


<분당/판교 북클럽 모임>

일시: 10월 16일(화) 저녁 7:30

장소: 성공회 분당교회

교재: 알리스터 맥그라스, <인간, Great Mystery>

북클럽지기: 강사은 (overfrost@naver.com)


<전주 북클럽 모임>

일시: 10월 19일(금) 저녁 7시

장소: 미정

교재: 알리스터 맥그라스, <우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6, 7장

북클럽지기: 김재상 (kjs75mc@naver.com)


<제주 북클럽 모임>

일시: 11월 2일(금) 저녁 8시

소: 제주 에스프레소 라운지

교재: 김기석, <신학자의 과학산책> 1부

북클럽지기: 팽동국 (paeng@jejunu.ac.kr)


<파사데나 북클럽 모임>

일시: 10월 24일 (수) 저녁 7:00

장소: 파사데나 장로교회

교재: 임택규, <아론의 송아지> 저자직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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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북클럽 이야기 | 얀양 북클럽]


| 김고운 (안양 북클럽 회원)




- 일시 : 9/28(금) 저녁 7시 30분

- 장소 : 범계 크리에이티브 카페

- 도서 : 과.도.기 1부~3부

- 참석인원 : 5명 


첫 모임이라 시작은 간단한 자기 소개와 더불어 참석하게 된 계기를 나누었습니다. 


미리 요약해 올 부분을 정해 놓아서, 가지고 온 요약본을 함께 읽고, 내용에 대해 나누고 싶은 생각을 자유롭게 이야기 했어요.  


생각해 온 몇 개의 질문을 가지고 토론도 하였습니다.^^ 특별히 무신론자와의 대화와 변증에 대해 할 이야기들이 많았죠.


국제백신연구소에서 근무하고 있는 한 자매는 과도기를 읽고 도전이 되서 앞으로 더 열심히 공부해야 겠다는 다짐을 하더군요. 성경도 제대로 읽고 싶다고 합니다. 한국에 여성 크리스천 과학자가 드문지라 앞으로가 기대가 되었습니다. 


과도기를 읽을수록 모두 성경 해석에도 관심이 많아졌습니다. 성경 본문의 원어의 의미, 문화적 배경 등 알고 싶은 것들이 많아지네요. 모르는게 많다보니 ㅋㅋㅋ 북클럽이 오래 지속되길 소원합니다. :-)


다음 모임(2주에 한번 모입니다)은 아래와 같습니다.


-일시 : 10/12(금) 저녁 7시 30분

-장소 : 범계 크리에이티브 카페

-도서 : 과.도.기 4부~5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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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북클럽 이야기 | 전주 북클럽]


| 김재상 (전주 북클럽 회원)



8월 전주 과신대 북클럽 BLUE는 특별한 스터디를 했습니다. 로버트 러셀의 과학신학방법론을 소개하는 정대경 박사의 글과 뉴턴 과학에 대한 신학의 영향을 소개하는 김재상 목사의 글을 함께 읽고 토론하였습니다. 러셀이 제안한 방법론인 ‘창조적 상호작용’은 다양한 사고들의 상호작용 속에서 만들어졌습니다. 비판적 실재론, 라카토슈의 연구프로그램방법론 등이 교차하며 하나의 큰 얼개를 만들었습니다. 함께 읽어오고 있는 <우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에서 알리스터 맥그라스가 비판적 실재론을 통한 과학과 신학의 대화를 제안하고 있는데, 이러한 맥그라스의 제안과 연구프로그램이라는 과학철학 작업이 공명을 이루어 나온 러셀의 방법론이었습니다. 뉴턴 과학에 대한 신학의 영향에 대한 과학사적 탐구 결과를 러셀의 방법론으로 읽어보니 과학과 신학의 대화 지점이 구체적으로 다가왔습니다. 


9월 모임도 특별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한일장신대학교에서 우종학 교수님의 특강을 함께 들었습니다. 특강 덕에 새로운 청년들이 전주 북클럽 회원에 가입했습니다. 식사를 하며 교제를 하고 특강 내용에 대해 나누었습니다. “과학을 과학대로, 신앙을 신앙대로" 그 의미를 살리는 특강이었습니다. 평범한 일상의 생활이 바로 하나님의 기적이라는 점을 다시 상기시키는 은혜(?)의 시간이었습니다. "과학을 예수 그리스도의 창조 사역을 탐구하는 활동이라는 새로운 정의가 인상 깊었다.”는 등 여러 나눔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맥그라스의 <우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5장 다윈의 진화이론에 대해 나누었습니다. 신학, 철학, 사회, 역사 측면에서 다윈의 진화이론이 가지고 있는 여러 의미와 가치들을 탐구하였습니다. 다윈이 지닌 질문은 오늘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도 발견했습니다.



** 전주 북클럽 BLUE 는 전주의 청년들이 모이는 북클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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