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신대 칼럼

성당과 시장

강사은
(
과신대 홍보/미디어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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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의 끝이 일주일 정도 남은 시점에 글을 쓰고 있습니다. 아침에 기상하자마자 먼저 찾아 보고, 출퇴근 시간에 집중해 묵상하며, 긴장 속에서 회의할 정리정돈하는 편안함을 제공하며, 낯선 곳을 찾아갈 인도자의 역할을 하는 스마트폰을 우리는 항상 옆에 두고 살고 있습니다마치 공기와 같이, 없어서는 안될 것만 같은 존재가 기기가 우리 가까이 있게 데에는 역사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오픈소스의 영향이 컸습니다. (오픈소스는 소프트웨어 혹은 하드웨어의 제작자의 권리를 지키면서 원시 코드를 누구나 열람할 있도록 소프트웨어 혹은 오픈 소스 라이선스에 준하는 모든 통칭을 일컫는다;위키수십 장의 3.5인치 디스켓을 갈아 끼워가며 PC 설치했던 제게는 대단한 과거 경험의 대상인 오픈소스 머신을 이제는 초등학생부터 성인까지 현대인의 대부분이 손에, 주머니 속에, 핸드백과 백팩에, 손목 시계 형태로 갖고 다니는 시대가 것입니다.

'
성당과 시장(The Cathedral and the Bazaar)' 컴퓨터 소프트웨어에 일대 혁신을 가져온 오픈 소스 운동을 경험자 입장에서 분석한 에릭 레이먼드(Eric Steven Raymond) 주요 글을 모은 제목입니다(온라인 서점에서 이북을 무료로 구할 있으니 관심이 있으신 분은 언제든 읽을 있겠습니다). 여기에서 '성당' 폐쇄형 공유 모델을, '시장' 개방형 공유 모델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며 개념을 글에서 사용하고자 합니다.

대표적 오픈소스인 리눅스(Linux) 0.11 버전 시절 독일에 있는 사람의 요청에 귀기울인 리누스 토발즈(Linus B.Torvalds) 메모리 양이 부족한 요청자의 환경을 위해 특별한 기능(디스크 페이징) 만듭니다. 날은 재미있게도 1991 12 성탄절이었고 말하자면 예수가 태어난 날에 다른 OS와의 본격적인 비교가 시작된 리눅스 0.12 버전이 완성된 것입니다. 0.12 버전 이후로 리눅스 사용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기 시작했고 2018 현재 서버 시장의 강자는 리눅스라고 만큼 입지는 커졌습니다지금의 스마트폰을 포함한 모바일 환경도 사실은 리눅스와 오픈소스 세상입니다.

과신대 운동은 리눅스(Linux) 탄생과 무척이나 닮았습니다. 리누스 토발즈의 헌신(그는 재미로 했다고 합니다만) 우종학 교수의 헌신, 인터넷 상의 공개와 SNS 상의 공유, 아마추어 개발자의 참여와 평신도의 참여, 싱글 태스킹 위주의 PC 환경을 멀티 태스킹의 세계로 이끈 점과 젊은지구론에 경도되었던 국내 개신교계에 창조기사와 과학에 대한 다양하고 정통한 인식을 심어주고 있는 점을 있겠습니다

과학과 종교를 서로 원수로 상정하는 대중매체와 대중적 논쟁 수준(“창조인가? 진화인가?” 식의) 머물러 있는 성당 모델의 과학 인식 환경에서 반지성적인 주장을 받아들이거나 아예 신앙을 거부하는 사태로 몰리는 그리스도인들의 질문을 외면하지 않은 과학자의 열정에서 시작한 과신대는 과학과 기독교의 관계가 불편한 것이 아니라 상보적이며 서로에게 유용할 있다는, 열린 대화의 장으로 안내하고 있습니다. 시장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과학은 오류와 미신으로부터 종교를 정화할 있으며, 종교는 맹목적 숭배와 잘못된 절대성으로부터 과학을 정화시킬 있다. 과학과 종교는 각각 서로가 번영할 있는 넓은 세계로 서로를 끌어당길 있다 표현과 같이  넓은 세계로 연결하는 통로이며 서로 다르나 함께 생각을 공유하고 대화하는 광장입니다성서의 창조 기사는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려주고 창조의 과학적 방식은 천문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과 같은 영역의 과학자들을 통해 연구되고 우리에게 전해집니다.  특별계시와 일반계시의 자연스럽고 조화로우며 놀라운 공명의 하모니를 우리는 과신대에서 경험합니다.

마치 견고해 보이나 좁디 좁은 성당 모델 안에서는 창조과학이 기독교 과학 인식의 유일한 대안인듯 보일 있으나 막상 넓은 시장으로 나와 보면 천주교, 그리스 정교, 성공회, 침례교, 감리교  세계 기독교의 주요 교단들은 진화학을 포함한 과학과의 갈등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을 있습니다(성공회는 2008, 천주교는 2009년에 찰스 다윈에게 공식 사과한 적도 있지요). 과신대의 위치도 창조과학과 같은 좁은 입지의 유사과학을 극복하려는 곳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과학과 신학의 균형잡힌 대화를 추구하되 특별히 과학주의, 과학이 모든 것을 설명해 것이라는 과도한 믿음뒤에 숨은 무신론의 도전에 응답하기 위한 좌표에 있으며 더불어 유신론을 지향하는 하지만 젊은지구론이 아니면 성서 기록은 마치 거짓이 되기라도 하는듯 오히려 무신론적 인식을 내포하고 있는 창조과학의 위험성도 알리고자 뿐입니다. 물론 창조기사에 관한 해석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열린 태도의 젊은지구론자라면 존중할 있습니다.

어린아이의 발랄함, 흥정하는 긴장감, 음식이 익는 냄새, 술잔 부딪히며 왁자지껄한 시장에서 일반계시의 해석자인 과학은 자유의 날개를 활짝 펼치고 있습니다 날갯짓과 공명하는, 특별계시의 해석자인 신학과의 대화를 우리는 성당이 아닌 시장에서 만들고 있습니다좁디 좁은 문자적 해석의 가두리 안에 과학을 우겨 넣어 창조주조차 틈새의 신으로 만들어 버리는 성당 모델에서는 경험할 없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덤입니다. 138억년의 우주와 지구 46억년의 과거에 있었던 그리고 앞으로 있게 모든 존재들을 격려하며 지지하는 하나님, 알파와 오메가까지 모든 피조물을 관통해 함께 하시는 성령 하나님을 우리는 매순간 숨쉬고 만지며 보고 들으며 먹고 마시며 묵상하고 깨닫습니다굳이 그랜드 캐니언까지 가지 않아도 가까운 영월에서 지구 연대의 증거를 있으니 돈도 굳었습니다.

초등학생 아들은 오늘도 리눅스 노트북을 열어 마인크래프트를 즐기며 파이썬 코드의 도움으로 캐릭터가 다니는 바닥을 온통 황금블록으로 빠르게 도배하고 있습니다일명 '황금발' 프로그램입니다과학은 생활 곳곳에서 안전하고 윤택한 삶을 영위하도록 도와주는 도우미이고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고 발견하게 하는 좋은 수단이기도 합니다.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이 과신대가 좋은 길라잡이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넓은 세상으로 나와 과신대와 함께 시장을 누비기를 청해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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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View Vol.11 / 2018.04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과신대 칼럼

과학과 신학의 대화를 삶에 적용하며 좌충우돌하는  

서광
(
과신대 대의원 / 기독대안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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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비오는 봄날 저녁에 서울대입구역 근처 교회에서 남부 북클럽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2년이 지난 지금까지 모임은 내가 속한 교육현장에 적용점을 찾는 설계도와 같았다답을 찾아 참여한 발걸음은 내게 도전을 만나게 했다 도전은 자연에 영원한 근사인 과학이 스펙트럼 의견을 포용하는 마음을 요구한 것이다명확해야 하고 이해가능해야 과학이 손에 잡힐 있는 생각들을 이제 살며시 놓고 다양성을 이해하고 차이를 구별하는 능력을 요구했다그래서 나의 호기심은 많은 장소로 이끌었다콜로퀴움포럼기초과정 등을 참여하면서 과학과 신학을 연결하는 사고의 지평은 넓어지고 균형을 이룰 있었다.


창조기사 논쟁 가지고 기초과정과 북클럽에서 연이어 나눔을 하면서 기독과학교사에서도 ‘과학교사창조를 말하다라는 모임으로 창조에 대한 다른 시각들을 서로 이해하고 나누는 상상을 해보았다자연스럽게 다른 과학교사들에게도 ‘창조 고민해 보고픈 마음이었다그러나 올해 번에 걸쳐 시도하였으나 여러 가지 이후로 아직 모임을 진행하지 못했다상상 현실의 간격을 맛보았다그러면서 ‘창조기사 논쟁이라는 책이 그냥 만들어지지 않았고 많은 노력과 시간이 있었음을 몸으로 알게 되었다.


가지 도전은 교육현장에 적용하는 것이었다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이 적어도 나처럼 헤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과 생각의 폭을 넓혀주고자 하는 마음이었다한편으로는 기독대안학교에 근무하면서 이제까지 과학지식만 가르친 것에 대한 회개이기도 했다그렇다고 과학지식도 제대로 가르친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나의 이런 의욕이 오히려 아이들에게 오개념을 갖게 하고 신앙을 방해하지 않을까하는 조바심으로 ‘일단’ 시작했다약간의 완벽주의자인 나에게는 시도인 셈이었다한국교회탐구센터에서 제작하고 있는 ‘101가지 질문 시리즈’ 영상과 ‘오리진 기본교재로 하여 의욕적으로 시작한 교육은 원대한 마음을 흡족하지 못하게 했다준비 부족아이들의 관심주변 교사의 오해 등은 다음을 준비하는 내게 업그레이드를 요구했다올해 1 교재제작TFT 시작모임에 참여하면서 아이들 눈높이에 맞는 교재를 만들어 교육을 준비하고 아이들의 관심을 높이는데 실마리를 찾고 있다더불어 ‘과학의 이용하여 학교 선생님들에게 창조를 딱딱하지 않고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접근해 보고자 한다.


오늘도 좌충우돌하는 徐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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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View Vol.10 / 2018.03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과신대 칼럼

신학도가 바라본 '과학과 신학의 대화' 난점과 희망

최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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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성경 아카데미 대표 / 과신대 홍보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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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달(2017 10 25) 장신대에서장신신학, 한국교회에 걸다!”라는 제하에 학술세미나가 열렸다장신대에서는 신학이 ‘시대적 문제들에 대해 시의적절한 답변을 찾아가는 과제 포함한다는 점을 인식하여 매년 현안과 쟁점과 필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분야의 전문가들과 함께 듣고, 묻고, 논의하는 자리를 마련해왔는데 이번 세미나 첫째 번째 영역의 주제가 바로과학과 신학의 대화였다. 명의 교수가 각각과학적 무신론의 도전 앞에 기독교 창조신앙’, ‘인간지능에 대한 이해’, ‘4 산업혁명과 인공지능이 가져올 새로운 선교의 기회라는 제목의 발표를 하였고 의미 있는 대화들이 오고갔다. 특히 장신대 김정형 교수(장신대 조직신학) 담당했던 [소위과학적 무신론 도전 앞에 기독교 창조 신앙] 필자에게 인상 깊었다.

 
김정형 교수는 발제를 통해과학적 무신론 도전 앞에서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창조신앙을 바르게 증언하기 위한  가지 과제를 제시했는데, 첫째는과학적 창조론(혹은창조과학’)’ 잘못된 접근 방법을 반성하고 극복하는 것이고, 번째는 성서학적 과제로서 과학시대를 위해 창세기를 새롭게 읽는 것이고, 번째는 조직신학의 분야인 과학시대를 위해 기독교 창조 신학 교의학적 창조론을 새롭게 쓰는 것이다

 
그는 과학혁명 이후 근대 과학이 전제한 세계관을자연주의적(naturalistic) 세계관이라 언급하였고방법론적 자연주의(methodological naturalism)’형이상학적 자연주의(metaphysical naturalism)’ 구분하여 초자연적인 존재를 상정하는 유신론과 양립불가능한 과학적 무신론자들의 주장인 후자를 무신론적 세계관을 내포하지 않으며 무신론과 유신론 모두에 중립적인 전자로부터 구분하여 신학은방법론적 자연주의 연계하여과학적 무신론 도전을 넘어설 디딤돌을 발견할 있다고 강조하였다. 필자가 보기에방법론적 자연주의형이상학적 자연주의 구분은 우종학 교수가 평소 강조한 진화론진화주의 구분한 점과 크게 공명을 이룬다. ‘방법적 자연주의진화론 같은 맥락이고형이상학적 자연주의진화주의 같은 궤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 그동안 우종학교수가 강조한 내용이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동일하게 지지되고 있음을 있다.

 
또한 김정형 교수는과학적 무신론 도전 앞에서과학적 창조론(혹은창조과학’)’으로 응대하는 것은 가장 나쁜 전략이라는 견해도 피력했다. ‘과학적 창조론(혹은창조과학’)’ 방법론적 자연주의의 한계 안에서 자연 세계를 탐구하는 근대 과학과 자연 세계의 궁극적 근원과 목적으로서 초월적인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형이상학적 이해를 추구하는 창조교리를 동일한 지평에 혼합하는 자기모순과 범주 혼동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그는 과학시대에 창세기를 바르게 읽기 위해서는 창세기 1장에 근대과학 이전의 고대 근동의 세계관이 반영되었음을 솔직히 인정할 필요가 있다는 월튼의 견해를 소개하였다. 이어과학적 창조론자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진리 외에 다른 무엇이 담겨 있다는 거부감을 따라 창조신앙의 진리와 성경에 내포된 고대근동의 세계관을 혼동하여 모든 것이 하나님의 진리라 주장하면, 결국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성서학적 진리 주장마저 부정하는 결과로 이어질 있음을 경고하였다. 오히려 성경기자가 자신의 신학적 관점에서 당대의과학적지식을 통합하는 방식을 신중하게 살펴신학적 지식과 과학적 지식을 통합시켜주는 바른 방법 배워야 함을 여러 신학자들의 글을 빌어 설득력 있게 진술하였다.
 
 
필자는 김정형 교수의 발제에 적극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제목에서 밝힌 주장을 따라 조금 나아가면과학과 신학의 대화 행함에 있어 겪게 되는 신학 내부의 난점을 만나게 된다

 
필자의 장신대 신학과 재학시절의 일화이다. 당시 신학교들은 각각의 신학적 입장에 심각한 차이가 있음을 인식하여 이를 극복하기 위해 학술제와 체육대회 다양한 노력들을 전개했었는데, 모임이 이어질수록 소위보수진보 차이와 차이로 말미암아 발생한흉한 도랑만을 절감하고 말았다. 당시 중도적 입장에서 극단의 신학적 견해를 조화시켜 보기 위해 필자를 포함한 모교 장신대의 신학생들이 최선을 다해 노력해보았지만 아이러니 하게도도대체 장신대의 신학은 뭐냐? 너희들은 박쥐냐? 너희들조차 견해가 서로 다른 무슨 일치냐?’라는 정당한(?) 비아냥을 받아야 만했다.

  20
년도 지난 과거의 이야기지만, 신학도의 입장에서도 교회를 위해서도 절박한 과제인 ‘과학과 신학의 대화 있어서  난점은 여전히 심각하다는 사실을 부인할 없다. 우종학 교수의 견해와 장신대의 견해가 공명을 이룬다는 것은 우종학 교수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 다른 신학적 학풍들이 상당수 존재한다는 것의 반증이 있다.

 
어쩌면 지점이과신대 몸담고 있는 여러 교단의 목회자와 신학도들이 심각하게 인식해야 하는 부분이 아닐까? ‘과학과 신학의 대화 바르고 적절하게 수행하기 위해서는 과학과 대화하기 위해 여러 신학적 학풍의 다양성의 풍성함을 유지하면서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찬미 더욱 풍성하게 하기 위한 신학도들의 유의미한 대화의 문법과 방법론 찾기가 절실하다는 것이다. 20 과학과 신학의 대화의 난점 당황하면서도 각기 다양한 관점과 방법들의 대화와 공명을 통해 창조와 구속의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풍성하게 찬양하고자 하는 포기할 없는 사명을 인식했을 때의 떨림을 중년이 넘어 다시금 경험하는 것은 기쁨이며 부담인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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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View Vol.7 / 2017.12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과신대 칼럼

기독교 대안 학교의 신학의 부재

정승화
(
수정 비전 학교 과학교사, 과신대 대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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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 대안 학교의 현장은 다양한 방면으로 결핍에 허덕인다. 『교육 기본 법』과 『초·중등 교육 법』은 의무 교육을 의무 취학으로만 규정하고 있어, 공교육에 취학한 학생들만 학교를 통해 정부로부터 오는 지원을 받고 있다. 반면 미인가 형태의 대안학교는 정부의 지원 대상에서 제외된다. 따라서 절대적으로 정부의 지원을 의지하여 운영되는 일반 학교들과는 달리 미인가 대안학교는 항상 재정적으로 어려움이 있고, 교육 시설도 열악하여 학생들이 배움의 현장에서 누려야 하는 것들로부터 유리되어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결핍의 문제가 있다. 학교들이 추구하는 기독교적 가치, 대안적 가치의 결핍이다. 학교가 지향하는 가치 철학은 대안 학교의 알파와 오메가이며, 학교의 모든 시스템, 커리큘럼, 학생 인재상의 바탕이 된다. 그리고 이것이 탁월하고 단단할 경우 열악한 시설 등은 극복 가능한 문제가 된다. 또한 자신들이 기치로 하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헌신하고 애쓰는 것은 대안학교의 자부심이자 자존심이다. 여러 어려움 앞에서 우리 학교 선생님들이 이를 다물며 쓰는 말로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가오 바로 우리가 옳다고 믿는 가치이다. 개별 학교가 대안으로 제시한 기독교적 대안이라는 것은 각자의 신학과 철학에 기반하고 있다. 때문에 내세우는 가치들이 교단에 따라 혹은 세세하게 따지면 개인에 따라서도 조금씩 다를 있다. 그러니 각기 다른 대안을 내세우는 다양한 양태의 기독교 대안 학교들이 존재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발생할 있다. 자신들이 내세우는 기독교적 가치가 올바르지 않거나 결핍된 학교는 앞서 말한 재정적 결핍보다 훨씬 심각한 상황을 야기시킨다. 건강한 신학이나 기독교적 가치가 결핍 되었을 , 학교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한번 살펴보자.

 
기독교 학교에서 추구하는 기독교적 가치가 윤리나 행동 방침을 성경의 가르침을 문자 그대로 적용하여 학생들에게 엄격한 기준을 요구하는 것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이런 학교가 차별화로 내세우는 것으로는 연애 금지, 일반 학교 보다 훨씬 엄격한 교칙, 징벌적 징계, 동성애 혐오 분위기, 미디어에 대한 죄악시 등이며,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나름 성경에 기반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올바른 신학 안에서 정립된 것이라고 보기 힘들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학생들은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보고, 하나님에 대한 편중된 생각을 가지게 되며, 수동적이고 폐쇄적인 자아를 가지게 된다. 이런 류의 문제 필자가 생각하기에 가장 심각한 문제는 학교의 시스템 커리큘럼이학생이 하나님을 알고 믿는 하나의 수단으로 여기게 만든다는 것이다. 최종적으로는 부모나 교사가 원하는 방향으로 학생들을 착한 아이, 순종적인 아이, 부지런한 아이로 키우기 위해 가장 중요한복음을 받아들이는 단계의 하나로 전락시켜버리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의 학벌주의와 결합해,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필요조건이라 인식하게 만들어버린다. “에이, 그건 당연히 가장 중요한 거고, 다른 것도 생각해야지라고 하는 순간 가장 중요한 것은 뒷전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가치의 전도가 일어난다.
 
 
학습 내용을 성경적인 방법으로 재해석하여 학생들에게 전달하는 긍정적인 시도도 많이 이루어진다. 교사들이 모여 회의하고, 교재를 재구성하기 위해 힘을 쏟는다. 과정에서 다른 교과목 교사들에게도 각자의 고충이 있겠지만 보수적인 기독교 환경 속에서 과학 교사로 이런 작업을 하는 것은 도전을 받는다.  많은 학교들이 채용 면접에서부터창조 과학을 가르칠 있겠느냐.’, ‘성경에서 나타난 사건을 과학적으로 풀어줄 있겠느냐.’ 라고 질문한다. 기독교 대안학교에서는 관점은 그들이 타협하지 않고 신앙을 지켜갈 있는 유일한 신학적 해석의 틀에 속하기 때문이다. 진화와 창조가 양립 불가능한 것으로 프레임을 짜고, 진화를 거부하는 것은 신앙인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만들어 버린다. 그것에 대한 합리적인 설득에도 실눈을 뜨고 노려본다. 필자가 근무하는 기독교 대안학교에서도 중학교 3학년 과정에서 배우는 진화론의 내용이나 나름 전문 분야인 우주론 등을 역사적 방법, 기독교적 세계관과 함께 해서 가르친 날이면 어김없이 학부모에게서 연락이 온다. ‘선생님 그렇게 안봤는데…’ 시작하는 자격 논란, 이단 시비는 이제는 자연스러운 과정처럼 여겨진다. 학부모에게서만 연락이 오면 다행이다. 교장, 동료 교사들 일부도 이런 내용을 가르치는 나를 좋은 눈으로 보지 않는다. 그들의 과학적 소양 부족이기도 하지만, 성서를 문자 그대로 오류가 없는 것으로 생각해 발생한 신학의 부재와 맞닿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와 같이 학습 내용의 재구성에도 올바른 신학이 필요하지만 그것이 결핍될 경우, 학생들의 지적 능력 발달이 저해되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왜곡해서 받아들이는 문제가 야기될 있다.
 
 
위에서 간단히 지적한 바와 같이 단단한 신학적 배경이 학교의 모든 부분에서 필요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신학적 배경만 있는 사람이 학교의 운영이나 학생 교육에 직접적인 부분을 관여해서는 안된다. 교육학적 배경이 없거나 교육 현장의 경험이 없는 목사나 선교사들이 리더인 학교들이 어설프게 운영되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교육 분야의 전문성과 신학적 배경이 함께 해야하는 것이다. 단순히다음 세대를 위한 기독교 교육이 필요하다 문제 인식만을 가지고 진지한 고민과 철학 없이 기독교 대안 학교를 시작하다가는 한국 기독교 사회에서 지적되는 여러가지 문제를 심화시킬 뿐이다. 교육의 전문성과 함께 건강한 신학이 함께 해야 한다.

 
과신대 대의원으로서 이야기도 덧붙이고 싶다. 기독교 대안 학교에서 나타나는 신학의 결핍 문제는 과학과 신학 사이의 대화에도 동일한 문제로 지적된다. 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등의 사회 전반의 문제를 해석할 때도 동일하게 지적된다. 이런 시대에 과신대의 방향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과신대가 지향하는건강한 신학학문 대화라는 모티브는 단순히 과학과 신학 사이의 대화에서 그치지 않기를 바란다. 시도들이 다른 영역에도 영향을 주어건강한 신학 다양한개별 영역사이의 대화로 확장되어 기독교 내의 지성 운동으로 확대, 발전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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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View Vol.6 / 2017.11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과신대 칼럼

과학과 신학은 대화해야 하는가?

장현일
(과신대
 총무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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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신학은 대화해야 하는가

   
첫째,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이심을 믿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이 세계를 지으신 분이 아니시라면 과학과 신학은 굳이 대화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연세계를 탐구하는 과학의 발견들이 우리의 신앙에 굳이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신이 창조주 하나님이시라는 사실 때문에 기독교는 결코 세계에 대해 무관심할 없으며 우리의 신앙은 세계를 탐구하는 과학의 발견과 무관할 없다

 
... 바로 가장 근본적인 신앙고백에서 출발한다. 기독교의 하나님이 천지의 창조주시라면 성경에서 계시되는 진리와 과학에서 발견되는 사실들이 서로 모순되거나 충돌할 없다.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은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서 특별계시를 주심과 동시에 자연세계를 통해 일반계시를 주시며, 계시는 서로 충돌하거나 모순되지 않는다는 믿음을 견지해 왔다

   
물론 구원을 얻는데 필요한 계시는 일반계시가 아니라 특별계시이다. 그러나 문제는 특별계시가 일반계시와 충돌하거나 모순된다면 계시의 동일한 원천이신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신앙 자체가 도전을 받게 된다는데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반계시가 구원을 얻는데 필요한 계시가 아니므로 중요하지 않고 오직 특별계시만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할 없다. 특별계시와 일반계시, 종류의 계시를 바르고 조화롭게 이해하는 일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둘째,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소통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단순히 죄를 용서받고 사후에 심판을 면하고 천국에 가는 것으로 국한될 없다. 우리는 주기도문의 가르침대로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일을 고대하고 일을 위해 힘써야 사명을 가진 자들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통하여 땅에 도래하는 하나님나라이고, 그것이 바로 기독교가 세상에 전하는 기쁜 소식일 것이다.

 
복음을 실천하기 위해 우리는 세상과 소통해야 한다. 왜냐하면 복음은 세상을 위한 기쁜 소식이며 하나님나라는 하늘이 아니라 땅에 임하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과학과 신학의 대화는 세상과 소통하는 가지 중요한 방식이다. 만일 우리가 과학의 발견에 무지하고 특별계시와 일반계시를 조화롭게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세상과 소통할 없을 것이며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소외되고 것이다.

 
우리는 세상의 온갖 지혜와 지식이 하나님으로부터 것들임을 믿는다. 그러나 세상은 그런 지혜와 지식을 어떻게 바르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해 알지 못한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그런 지혜와 지식을 주신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준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해 주어진 특별계시는 일반계시로 주어진 세상의 온갖 지혜와 지식을 어떻게 바르게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할 것인가를 가르쳐 준다. 세상이 고통스러운 것은 지혜와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것들을 어떻게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할 것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일반계시로서의 과학의 발견과 특별계시로서의 성경의 진리를 모순되지 않고 조화롭게 이해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다. 이것은 특별계시를 특별계시답게 만드는 일일 아니라 일반계시를 하나님의 뜻대로 바르게 사용하기 위해서도 중요하다. ... 바로 단추를 꿰는 임무를 감당하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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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View Vol.5 / 2017.09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과신대 칼럼

미끄러운 경사길 논증

이택환 목사
(
그소망교회 담임 / 과신대 자문위원, 고려대학교 사회학과, 장신대신대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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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적인 생명윤리학자들이 종종 거론하는미끄러운 경사길 논증”(slippery slope arguments)이라는 것이 있다. 만약 “A" 허용하면 자동적으로 “B,” “C” 허용해야 하고, 결과 절대로 허용해서는 “N" 까지 허용하게 된다는 주장이다. 가령 처음부터 모든 낙태를 금지해야지, 유전병, 강간에 의한 임신 , 낙태가 가능한 예외 규정들을 두다 보면 낙태의 범위가 계속 늘어나, 결국 낙태가 일상화 것이며, 이로 인해 우리 사회에 생명 경시 풍조가 확산된다는 것이다.


  요즘은 동성애를 반대하는 사람들도 이와 비슷한 주장을 한다. 동성애를 허용하면, 소아 성애, 근친상간도 금지할 방법이 없고 마침내는 수간까지 허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미끄러운 경사길 논증 성경에 고스란히 적용하는 단체가 기독교 근본주의 문자주의 그룹인 창조과학회다. 그들이 창세기 1장의 6 창조에 그토록 집착하는 이유는 6 창조를 문자적으로 믿지 않으면,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믿지 않게 되며, 그렇게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믿지 않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도 문자적으로 믿을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겉으로 말은 하지 않아도 실은 6 창조를 믿지 않으면 구원도 없다는 생각을 어느 정도 갖고 있을 것이다. 이런 입장은 단지 6 창조만이 아니라, 노아의 홍수가 지구적이라는 사실, 여호수아가 태양을 멈추게 사실 등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그들은 요나를 삼킨 물고기가 실재한다는 사실, 발람의 나귀가 사람의 말을 했다는 사실 , 성경의 모든 사건과 이야기를 과학적이고 역사적인 사실로 굳게 믿는다. 하나라도 부정하면, 마치 미끄러운 경사길을 내려가는 것처럼 성경의 모든 기적을 부정해야 하고, 이는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하는 것이며, 결국 구원을 부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미끄러운 경사길 논증 100% 오류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모든 길이 항상 미끄러운 것은 아니며, 내리막 경사길이 아닌 평지도 있고 때로는 오르막길도 있다. 무엇보다 미끄러운 경사길 논증에는 종종 무리한 비약이 많다. 민수기 22장의 발람의 나귀 이야기를 보자. 소위 하나님의 예언자라는 발람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자, 나귀가 직접 사람의 언어로 그를 질타했다는 이야기다. 주제는 돈에 눈이 멀어 짐승만도 못한 상태로 타락한 하나님의 예언자에 대한 비판이다. 이야기는 우화적 상징과 과장, 풍자와 같은 문학적 장치를 사용한다. 최소한 중학교 국어 교육을 받은 사람들 중에 이를 날조된 거짓말이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다면 발람의 말하는 나귀 사건은 과연미끄러운 경사길 타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까지 그대로 내려가는가? 이는 발람의 나귀 사건이 예수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과 동일한 기독교의 진리를 드러낸다고 보는지를 묻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지난 2000년간 교회가 목숨 걸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했는데, 그것으로 부족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번도 교회가 발람의 말하는 나귀 사건을 목숨을 걸고 증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건은 애초에 비교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사건을 동일선상에서 보는 것은 신실하신 하나님의 언약 성취요, 절대적인 구원 계시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성경의 무수한 이야기 가운데 하나로 상대화시키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이런 오류는 6 창조를 비롯한 창조과학회가 주장하는 다른 모든 이야기에도 대부분 적용된다. 창조과학회는 성경을 미끄러운 경사길이라는 허구적 시스템으로 파악하는 그릇된 성경 이해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 요구되는 것이 성경의 각각의 사건에 대한 올바른 해석이다. 창조과학회가 제대로 배워야 것은 단지 과학만이 아니다. 그들은 이제라도 기존의 아마츄어적인 성경이해와 저급한 성경해석에서 벗어나야 한다. 일개 목회자의 지적이야 그렇다 하더라도, 창조과학회를 향한 전문 성서신학자들의 비판에는 부디 기울여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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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View Vol.4 / 2017.08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과신대 칼럼

4 산업혁명시대의 교회와 과신대


김재상
(
과신대 기획이사전주생동하는 교회 목사전북대 과학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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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경제 산업이나 과학기술 뉴스를 보면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4 산업혁명이라는 말과 마주 대하게 된다. 전부터 교계에서도 4 산업혁명과 관련하여 교회의 미래와 신앙교육에 대한 논의가 이어오고 있다. 4 산업혁명 시대에는 물리학, 생물학, 디지털 기반 기술을 바탕으로 사람과 사물, 사물과 사물이 융합되는 하이브리드 사회가 도래하리라고 보고 있다. 하이브리드 시대에 교회 사역은 어떠한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하는가?


 
먼저 교회는 4 산업혁명 패러다임을 읽을 있는 과학기술 문해력을 높여야 한다. 교회는 성경을 읽는 눈과 함께 시대를 읽을 있는 능력을 지녀야 한다. 성경과 시대를 함께 읽어갈 교회는 시대를 통찰하며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된다. 4 산업혁명은 단순한 유행이 아닌 시대 흐름이다. 교회는 과학기술 문해력을 높여 하이브리드 시대를 읽으며 시대의 저변에 흐르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해가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가 담고 있는 의미를 첨단과학기술 시대라는 맥락 안에서 풀어가야 한다. 이러한 통찰 가운데 교회는 4 산업혁명시대에도 시대의 예언자로 있을 있다.

  과학기술을 경제발전의 도구로 보는 한국사회에서 4 산업혁명 역시 경제적 효율성 입장에서 읽히고 있다. 쟈크 엘룰이 말한 바처럼 효율성을 강조하는 기술발전은 인간의 자유 박탈로 이어지며 인간 정체성과 존재 가치는 자본의 용어로 바뀌게 된다. 4 산업혁명의 하이브리드는 정체성 상실이 아닌 재구성이다. 그러기에 한국교회는 인간 정체성 회복을 부르짖는 예언자가 되어야 한다. 교회는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자리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이브리드 시대에 던지며 인간 의미와 자유를 상기시켜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형상에 대한 신학적 해석을 음미하며 4 산업혁명시대의 인간관을 그려가야 한다

  크리스천 인재 양성은 4 산업혁명시대에도 필수이다. 인재 양성을 위해서는 교회 교육에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19세기 정신과 20세기 방식으로는 21세기 인재를 길러낼 없다. 교회 교육방식과 콘텐츠에 변화가 필요하다. 교회는 인공지능과 디지털기술 여러 기술을 검토하며 교회교육현장에 점차적으로 도입시켜나가야 한다. 그리고 4 산업혁명에 대한 통찰을 교육 콘텐츠로 전환하는 능력을 갖추어 과학, 기술, 공학, 예술, 수학이 통합되는 STEAM 교육에 종교적 성찰을 융합해가야 한다

  그리고 오이코스의 변주가 필요하다. 돌봄과 연대의 공동체 형성이다. 교회는 공동체를 의미와 자유를 박탈당한 이웃으로 확장해 나가야 한다. 4 산업혁명시대에는 누구나 모두 자유롭게 과학기술에 접근할 있다는 생각은 오산이다. 정치, 경제, 사회 측면에서 과학기술에 접근하는 정도가 다르며 차이는 계급화로 진행될 있다. 교회는 사회적 약자가 더욱 쉽게 과학기술에 접근하도록 도와야 한다. 또한 교회는 사회안전망을 요구할 필요가 있다. 4 산업혁명으로 인한 실업에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현실이다. 여러 교우가 실업 위기 한복판에 있게 된다. 한국교회는 작게는 교우를 위해 크게는 한국사회의 안전을 위해 사회안전망 정비를 긴급히 촉구해야 한다.  

  이러한 오이코스의 변주는 과학기술 결과물에 대한 소수의 독식과 과학기술의 자본화에 저항하며 과학기술의 공공성을 강조하는 과학기술시민권운동으로 연장될 있다. 이를 위해 한국교회는 한국 과학기술담론에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생명, 사랑, 평화, 공생, 긍휼과 같은 기독교 가치를 사회 용어로 바꾸어 과학기술 공론장에서 토의해가며 기독교 가치가 한국 과학기술문화에 스며들도록 해야 한다.

  4 산업혁명시대에 이러한 교회 사역을 위해서는 우리 <..> 역할이 막중하다. 교회가 이러한 활동을 펼칠 있도록 우리는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 우리의 내부 역량을 더욱 강화시켜 나가야 한다. 지금까지 콜로키움, 포럼, 북스터디, 기초교육과정 등을 통해 <..> 역량이 성장하고 있으며 이는 한국 교계에서 상당한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4 산업혁명의 교회를 위해 이제 우리가 지닌 인식의 틀을 확장시킬 필요가 있다. 과학은과학들이며 신학은신학들이다. 과학과 신학 모두 여러 분과로 구성되어 있다. 과학과 신학의 대화에 더욱 많은 분과들이 참여하였으면 한다. 그리고 이론적인 측면과 함께 실천적인 측면에서도 대화가 이루어졌으면 한다. 이처럼 외연이 확장된 대화 가운데 <..> 한국교회를 위한 과학기술 공론장 역할을 톡톡히 해나가리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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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View Vol.3 / 2017.07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과신대 칼럼

철학하는 기독교인이 됩시다


김남호

(울산대학교 철학과 교수, 과신대 연구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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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 10 ‘과학과 신학의 대화(이하 과신대)’ 모임에 참석했을 때를 잊을 없습니다독일에서 페이스북을 통해서 대화 나눴던 우종학 교수님과 몇몇 회원 분들을 실제로 만나게 되었지요우리는 자유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