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신대 칼럼

기독교 대안 학교의 신학의 부재

정승화
(
수정 비전 학교 과학교사, 과신대 대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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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 대안 학교의 현장은 다양한 방면으로 결핍에 허덕인다. 『교육 기본 법』과 『초·중등 교육 법』은 의무 교육을 의무 취학으로만 규정하고 있어, 공교육에 취학한 학생들만 학교를 통해 정부로부터 오는 지원을 받고 있다. 반면 미인가 형태의 대안학교는 정부의 지원 대상에서 제외된다. 따라서 절대적으로 정부의 지원을 의지하여 운영되는 일반 학교들과는 달리 미인가 대안학교는 항상 재정적으로 어려움이 있고, 교육 시설도 열악하여 학생들이 배움의 현장에서 누려야 하는 것들로부터 유리되어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결핍의 문제가 있다. 학교들이 추구하는 기독교적 가치, 대안적 가치의 결핍이다. 학교가 지향하는 가치 철학은 대안 학교의 알파와 오메가이며, 학교의 모든 시스템, 커리큘럼, 학생 인재상의 바탕이 된다. 그리고 이것이 탁월하고 단단할 경우 열악한 시설 등은 극복 가능한 문제가 된다. 또한 자신들이 기치로 하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헌신하고 애쓰는 것은 대안학교의 자부심이자 자존심이다. 여러 어려움 앞에서 우리 학교 선생님들이 이를 다물며 쓰는 말로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가오 바로 우리가 옳다고 믿는 가치이다. 개별 학교가 대안으로 제시한 기독교적 대안이라는 것은 각자의 신학과 철학에 기반하고 있다. 때문에 내세우는 가치들이 교단에 따라 혹은 세세하게 따지면 개인에 따라서도 조금씩 다를 있다. 그러니 각기 다른 대안을 내세우는 다양한 양태의 기독교 대안 학교들이 존재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발생할 있다. 자신들이 내세우는 기독교적 가치가 올바르지 않거나 결핍된 학교는 앞서 말한 재정적 결핍보다 훨씬 심각한 상황을 야기시킨다. 건강한 신학이나 기독교적 가치가 결핍 되었을 , 학교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한번 살펴보자.

 
기독교 학교에서 추구하는 기독교적 가치가 윤리나 행동 방침을 성경의 가르침을 문자 그대로 적용하여 학생들에게 엄격한 기준을 요구하는 것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이런 학교가 차별화로 내세우는 것으로는 연애 금지, 일반 학교 보다 훨씬 엄격한 교칙, 징벌적 징계, 동성애 혐오 분위기, 미디어에 대한 죄악시 등이며,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나름 성경에 기반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올바른 신학 안에서 정립된 것이라고 보기 힘들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학생들은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보고, 하나님에 대한 편중된 생각을 가지게 되며, 수동적이고 폐쇄적인 자아를 가지게 된다. 이런 류의 문제 필자가 생각하기에 가장 심각한 문제는 학교의 시스템 커리큘럼이학생이 하나님을 알고 믿는 하나의 수단으로 여기게 만든다는 것이다. 최종적으로는 부모나 교사가 원하는 방향으로 학생들을 착한 아이, 순종적인 아이, 부지런한 아이로 키우기 위해 가장 중요한복음을 받아들이는 단계의 하나로 전락시켜버리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의 학벌주의와 결합해,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필요조건이라 인식하게 만들어버린다. “에이, 그건 당연히 가장 중요한 거고, 다른 것도 생각해야지라고 하는 순간 가장 중요한 것은 뒷전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가치의 전도가 일어난다.
 
 
학습 내용을 성경적인 방법으로 재해석하여 학생들에게 전달하는 긍정적인 시도도 많이 이루어진다. 교사들이 모여 회의하고, 교재를 재구성하기 위해 힘을 쏟는다. 과정에서 다른 교과목 교사들에게도 각자의 고충이 있겠지만 보수적인 기독교 환경 속에서 과학 교사로 이런 작업을 하는 것은 도전을 받는다.  많은 학교들이 채용 면접에서부터창조 과학을 가르칠 있겠느냐.’, ‘성경에서 나타난 사건을 과학적으로 풀어줄 있겠느냐.’ 라고 질문한다. 기독교 대안학교에서는 관점은 그들이 타협하지 않고 신앙을 지켜갈 있는 유일한 신학적 해석의 틀에 속하기 때문이다. 진화와 창조가 양립 불가능한 것으로 프레임을 짜고, 진화를 거부하는 것은 신앙인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만들어 버린다. 그것에 대한 합리적인 설득에도 실눈을 뜨고 노려본다. 필자가 근무하는 기독교 대안학교에서도 중학교 3학년 과정에서 배우는 진화론의 내용이나 나름 전문 분야인 우주론 등을 역사적 방법, 기독교적 세계관과 함께 해서 가르친 날이면 어김없이 학부모에게서 연락이 온다. ‘선생님 그렇게 안봤는데…’ 시작하는 자격 논란, 이단 시비는 이제는 자연스러운 과정처럼 여겨진다. 학부모에게서만 연락이 오면 다행이다. 교장, 동료 교사들 일부도 이런 내용을 가르치는 나를 좋은 눈으로 보지 않는다. 그들의 과학적 소양 부족이기도 하지만, 성서를 문자 그대로 오류가 없는 것으로 생각해 발생한 신학의 부재와 맞닿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와 같이 학습 내용의 재구성에도 올바른 신학이 필요하지만 그것이 결핍될 경우, 학생들의 지적 능력 발달이 저해되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왜곡해서 받아들이는 문제가 야기될 있다.
 
 
위에서 간단히 지적한 바와 같이 단단한 신학적 배경이 학교의 모든 부분에서 필요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신학적 배경만 있는 사람이 학교의 운영이나 학생 교육에 직접적인 부분을 관여해서는 안된다. 교육학적 배경이 없거나 교육 현장의 경험이 없는 목사나 선교사들이 리더인 학교들이 어설프게 운영되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교육 분야의 전문성과 신학적 배경이 함께 해야하는 것이다. 단순히다음 세대를 위한 기독교 교육이 필요하다 문제 인식만을 가지고 진지한 고민과 철학 없이 기독교 대안 학교를 시작하다가는 한국 기독교 사회에서 지적되는 여러가지 문제를 심화시킬 뿐이다. 교육의 전문성과 함께 건강한 신학이 함께 해야 한다.

 
과신대 대의원으로서 이야기도 덧붙이고 싶다. 기독교 대안 학교에서 나타나는 신학의 결핍 문제는 과학과 신학 사이의 대화에도 동일한 문제로 지적된다. 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등의 사회 전반의 문제를 해석할 때도 동일하게 지적된다. 이런 시대에 과신대의 방향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과신대가 지향하는건강한 신학학문 대화라는 모티브는 단순히 과학과 신학 사이의 대화에서 그치지 않기를 바란다. 시도들이 다른 영역에도 영향을 주어건강한 신학 다양한개별 영역사이의 대화로 확장되어 기독교 내의 지성 운동으로 확대, 발전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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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View Vol.6 / 2017.11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과신대 칼럼

과학과 신학은 대화해야 하는가?

장현일
(과신대
 총무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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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신학은 대화해야 하는가

   
첫째,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이심을 믿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이 세계를 지으신 분이 아니시라면 과학과 신학은 굳이 대화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연세계를 탐구하는 과학의 발견들이 우리의 신앙에 굳이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신이 창조주 하나님이시라는 사실 때문에 기독교는 결코 세계에 대해 무관심할 없으며 우리의 신앙은 세계를 탐구하는 과학의 발견과 무관할 없다

 
... 바로 가장 근본적인 신앙고백에서 출발한다. 기독교의 하나님이 천지의 창조주시라면 성경에서 계시되는 진리와 과학에서 발견되는 사실들이 서로 모순되거나 충돌할 없다.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은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서 특별계시를 주심과 동시에 자연세계를 통해 일반계시를 주시며, 계시는 서로 충돌하거나 모순되지 않는다는 믿음을 견지해 왔다

   
물론 구원을 얻는데 필요한 계시는 일반계시가 아니라 특별계시이다. 그러나 문제는 특별계시가 일반계시와 충돌하거나 모순된다면 계시의 동일한 원천이신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신앙 자체가 도전을 받게 된다는데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반계시가 구원을 얻는데 필요한 계시가 아니므로 중요하지 않고 오직 특별계시만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할 없다. 특별계시와 일반계시, 종류의 계시를 바르고 조화롭게 이해하는 일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둘째,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소통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단순히 죄를 용서받고 사후에 심판을 면하고 천국에 가는 것으로 국한될 없다. 우리는 주기도문의 가르침대로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일을 고대하고 일을 위해 힘써야 사명을 가진 자들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통하여 땅에 도래하는 하나님나라이고, 그것이 바로 기독교가 세상에 전하는 기쁜 소식일 것이다.

 
복음을 실천하기 위해 우리는 세상과 소통해야 한다. 왜냐하면 복음은 세상을 위한 기쁜 소식이며 하나님나라는 하늘이 아니라 땅에 임하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과학과 신학의 대화는 세상과 소통하는 가지 중요한 방식이다. 만일 우리가 과학의 발견에 무지하고 특별계시와 일반계시를 조화롭게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세상과 소통할 없을 것이며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소외되고 것이다.

 
우리는 세상의 온갖 지혜와 지식이 하나님으로부터 것들임을 믿는다. 그러나 세상은 그런 지혜와 지식을 어떻게 바르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해 알지 못한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그런 지혜와 지식을 주신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준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해 주어진 특별계시는 일반계시로 주어진 세상의 온갖 지혜와 지식을 어떻게 바르게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할 것인가를 가르쳐 준다. 세상이 고통스러운 것은 지혜와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것들을 어떻게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할 것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일반계시로서의 과학의 발견과 특별계시로서의 성경의 진리를 모순되지 않고 조화롭게 이해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다. 이것은 특별계시를 특별계시답게 만드는 일일 아니라 일반계시를 하나님의 뜻대로 바르게 사용하기 위해서도 중요하다. ... 바로 단추를 꿰는 임무를 감당하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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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View Vol.5 / 20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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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칼럼

미끄러운 경사길 논증

이택환 목사
(
그소망교회 담임 / 과신대 자문위원, 고려대학교 사회학과, 장신대신대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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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적인 생명윤리학자들이 종종 거론하는미끄러운 경사길 논증”(slippery slope arguments)이라는 것이 있다. 만약 “A" 허용하면 자동적으로 “B,” “C” 허용해야 하고, 결과 절대로 허용해서는 “N" 까지 허용하게 된다는 주장이다. 가령 처음부터 모든 낙태를 금지해야지, 유전병, 강간에 의한 임신 , 낙태가 가능한 예외 규정들을 두다 보면 낙태의 범위가 계속 늘어나, 결국 낙태가 일상화 것이며, 이로 인해 우리 사회에 생명 경시 풍조가 확산된다는 것이다.


  요즘은 동성애를 반대하는 사람들도 이와 비슷한 주장을 한다. 동성애를 허용하면, 소아 성애, 근친상간도 금지할 방법이 없고 마침내는 수간까지 허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미끄러운 경사길 논증 성경에 고스란히 적용하는 단체가 기독교 근본주의 문자주의 그룹인 창조과학회다. 그들이 창세기 1장의 6 창조에 그토록 집착하는 이유는 6 창조를 문자적으로 믿지 않으면,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믿지 않게 되며, 그렇게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믿지 않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도 문자적으로 믿을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겉으로 말은 하지 않아도 실은 6 창조를 믿지 않으면 구원도 없다는 생각을 어느 정도 갖고 있을 것이다. 이런 입장은 단지 6 창조만이 아니라, 노아의 홍수가 지구적이라는 사실, 여호수아가 태양을 멈추게 사실 등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그들은 요나를 삼킨 물고기가 실재한다는 사실, 발람의 나귀가 사람의 말을 했다는 사실 , 성경의 모든 사건과 이야기를 과학적이고 역사적인 사실로 굳게 믿는다. 하나라도 부정하면, 마치 미끄러운 경사길을 내려가는 것처럼 성경의 모든 기적을 부정해야 하고, 이는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하는 것이며, 결국 구원을 부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미끄러운 경사길 논증 100% 오류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모든 길이 항상 미끄러운 것은 아니며, 내리막 경사길이 아닌 평지도 있고 때로는 오르막길도 있다. 무엇보다 미끄러운 경사길 논증에는 종종 무리한 비약이 많다. 민수기 22장의 발람의 나귀 이야기를 보자. 소위 하나님의 예언자라는 발람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자, 나귀가 직접 사람의 언어로 그를 질타했다는 이야기다. 주제는 돈에 눈이 멀어 짐승만도 못한 상태로 타락한 하나님의 예언자에 대한 비판이다. 이야기는 우화적 상징과 과장, 풍자와 같은 문학적 장치를 사용한다. 최소한 중학교 국어 교육을 받은 사람들 중에 이를 날조된 거짓말이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다면 발람의 말하는 나귀 사건은 과연미끄러운 경사길 타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까지 그대로 내려가는가? 이는 발람의 나귀 사건이 예수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과 동일한 기독교의 진리를 드러낸다고 보는지를 묻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지난 2000년간 교회가 목숨 걸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했는데, 그것으로 부족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번도 교회가 발람의 말하는 나귀 사건을 목숨을 걸고 증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건은 애초에 비교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사건을 동일선상에서 보는 것은 신실하신 하나님의 언약 성취요, 절대적인 구원 계시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성경의 무수한 이야기 가운데 하나로 상대화시키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이런 오류는 6 창조를 비롯한 창조과학회가 주장하는 다른 모든 이야기에도 대부분 적용된다. 창조과학회는 성경을 미끄러운 경사길이라는 허구적 시스템으로 파악하는 그릇된 성경 이해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 요구되는 것이 성경의 각각의 사건에 대한 올바른 해석이다. 창조과학회가 제대로 배워야 것은 단지 과학만이 아니다. 그들은 이제라도 기존의 아마츄어적인 성경이해와 저급한 성경해석에서 벗어나야 한다. 일개 목회자의 지적이야 그렇다 하더라도, 창조과학회를 향한 전문 성서신학자들의 비판에는 부디 기울여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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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View Vol.4 / 20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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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칼럼

4 산업혁명시대의 교회와 과신대


김재상
(
과신대 기획이사전주생동하는 교회 목사전북대 과학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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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경제 산업이나 과학기술 뉴스를 보면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4 산업혁명이라는 말과 마주 대하게 된다. 전부터 교계에서도 4 산업혁명과 관련하여 교회의 미래와 신앙교육에 대한 논의가 이어오고 있다. 4 산업혁명 시대에는 물리학, 생물학, 디지털 기반 기술을 바탕으로 사람과 사물, 사물과 사물이 융합되는 하이브리드 사회가 도래하리라고 보고 있다. 하이브리드 시대에 교회 사역은 어떠한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하는가?


 
먼저 교회는 4 산업혁명 패러다임을 읽을 있는 과학기술 문해력을 높여야 한다. 교회는 성경을 읽는 눈과 함께 시대를 읽을 있는 능력을 지녀야 한다. 성경과 시대를 함께 읽어갈 교회는 시대를 통찰하며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된다. 4 산업혁명은 단순한 유행이 아닌 시대 흐름이다. 교회는 과학기술 문해력을 높여 하이브리드 시대를 읽으며 시대의 저변에 흐르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해가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가 담고 있는 의미를 첨단과학기술 시대라는 맥락 안에서 풀어가야 한다. 이러한 통찰 가운데 교회는 4 산업혁명시대에도 시대의 예언자로 있을 있다.

  과학기술을 경제발전의 도구로 보는 한국사회에서 4 산업혁명 역시 경제적 효율성 입장에서 읽히고 있다. 쟈크 엘룰이 말한 바처럼 효율성을 강조하는 기술발전은 인간의 자유 박탈로 이어지며 인간 정체성과 존재 가치는 자본의 용어로 바뀌게 된다. 4 산업혁명의 하이브리드는 정체성 상실이 아닌 재구성이다. 그러기에 한국교회는 인간 정체성 회복을 부르짖는 예언자가 되어야 한다. 교회는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자리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이브리드 시대에 던지며 인간 의미와 자유를 상기시켜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형상에 대한 신학적 해석을 음미하며 4 산업혁명시대의 인간관을 그려가야 한다

  크리스천 인재 양성은 4 산업혁명시대에도 필수이다. 인재 양성을 위해서는 교회 교육에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19세기 정신과 20세기 방식으로는 21세기 인재를 길러낼 없다. 교회 교육방식과 콘텐츠에 변화가 필요하다. 교회는 인공지능과 디지털기술 여러 기술을 검토하며 교회교육현장에 점차적으로 도입시켜나가야 한다. 그리고 4 산업혁명에 대한 통찰을 교육 콘텐츠로 전환하는 능력을 갖추어 과학, 기술, 공학, 예술, 수학이 통합되는 STEAM 교육에 종교적 성찰을 융합해가야 한다

  그리고 오이코스의 변주가 필요하다. 돌봄과 연대의 공동체 형성이다. 교회는 공동체를 의미와 자유를 박탈당한 이웃으로 확장해 나가야 한다. 4 산업혁명시대에는 누구나 모두 자유롭게 과학기술에 접근할 있다는 생각은 오산이다. 정치, 경제, 사회 측면에서 과학기술에 접근하는 정도가 다르며 차이는 계급화로 진행될 있다. 교회는 사회적 약자가 더욱 쉽게 과학기술에 접근하도록 도와야 한다. 또한 교회는 사회안전망을 요구할 필요가 있다. 4 산업혁명으로 인한 실업에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현실이다. 여러 교우가 실업 위기 한복판에 있게 된다. 한국교회는 작게는 교우를 위해 크게는 한국사회의 안전을 위해 사회안전망 정비를 긴급히 촉구해야 한다.  

  이러한 오이코스의 변주는 과학기술 결과물에 대한 소수의 독식과 과학기술의 자본화에 저항하며 과학기술의 공공성을 강조하는 과학기술시민권운동으로 연장될 있다. 이를 위해 한국교회는 한국 과학기술담론에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생명, 사랑, 평화, 공생, 긍휼과 같은 기독교 가치를 사회 용어로 바꾸어 과학기술 공론장에서 토의해가며 기독교 가치가 한국 과학기술문화에 스며들도록 해야 한다.

  4 산업혁명시대에 이러한 교회 사역을 위해서는 우리 <..> 역할이 막중하다. 교회가 이러한 활동을 펼칠 있도록 우리는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 우리의 내부 역량을 더욱 강화시켜 나가야 한다. 지금까지 콜로키움, 포럼, 북스터디, 기초교육과정 등을 통해 <..> 역량이 성장하고 있으며 이는 한국 교계에서 상당한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4 산업혁명의 교회를 위해 이제 우리가 지닌 인식의 틀을 확장시킬 필요가 있다. 과학은과학들이며 신학은신학들이다. 과학과 신학 모두 여러 분과로 구성되어 있다. 과학과 신학의 대화에 더욱 많은 분과들이 참여하였으면 한다. 그리고 이론적인 측면과 함께 실천적인 측면에서도 대화가 이루어졌으면 한다. 이처럼 외연이 확장된 대화 가운데 <..> 한국교회를 위한 과학기술 공론장 역할을 톡톡히 해나가리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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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View Vol.3 / 2017.07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과신대 칼럼

철학하는 기독교인이 됩시다


김남호

(울산대학교 철학과 교수, 과신대 연구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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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 10 ‘과학과 신학의 대화(이하 과신대)’ 모임에 참석했을 때를 잊을 없습니다독일에서 페이스북을 통해서 대화 나눴던 우종학 교수님과 몇몇 회원 분들을 실제로 만나게 되었지요우리는 자유의지 문제에 대해서 토론을 하면서 과신대의 미래에 대해 의논하였습니다그때 저는 우리 모임이 마치 먼지와 가스가 모여 하나의 눈부신 별로 성장해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있었습니다.


  언젠가 과신대라는 이름이 불공평하다는 느낌이 적이 있습니다철학이 없이 과학과 신학만 이름에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지요그러나그런 느낌은 사라졌습니다왜냐하면철학은 과학과 신학의 대화를 하는 데에 있어서 보이지 않는 공기와 같기 때문입니다공기가 없다면 대화도 없듯이철학이 없으면 과학과 신학의 대화도 가능하지 않습니다.


  철학은 의미와 근거를 묻고 그에 답을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철학행위란 의미를 묻고 근거를 묻는 행위인 것이지요철학사란 바로 의미와 근거를 묻고 답해온 사유의 역사인 것입니다


  플라톤의 저작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는 철학함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상대로 하여금(물론 자기자신서부터그가 참이라고 믿고 있었던 생각을 다시 돌이켜보도록 만듭니다예를 들어우리는 일상에서 “그는 좋은 삶을 살고 있어”, “대한민국의 19 대통령은 좋은 대통령이야라고 쉽게 말하지만소크라테스는 “좋은 ”, “좋은 대통령 의미가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해보라고 요구합니다그리고그에 대해 나의 주장을 말한다면다시 주장의 근거에 대해 생각해볼 것을 요구합니다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자신의 철학적 자서전인  사람을 보라에서 자신의 사상을 다이너마이트라고 표현합니다그러나의미와 근거를 묻는 철학은 자체로 다이너마이트와 같은 사유의 폭발력과 정치적 혁명성을 가지고 있습니다남들이 당연시하는 생각의 내용을 다시 검토해볼 것을다른 시각에서 생각해 것을 객관적으로 설득력 있는 근거를 제시하도록 요구하기 때문입니다권력자들의 미움을 소크라테스가 결국 사형선고를 받은 이유는 바로 철학활동이 가지는 원초적인 정치적 혁명성 때문인 것이지요.


  기독교인들은  철학을 해야하는 것일까요단지 믿기만 하면 되는 아닐까요혹은 철학을 하면 믿음을 버리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지는 않을까요누군가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해서 갑자기 그의 어깨에서 날개가 돋아나거나타인의 마음을 읽을 있거나사회의 법을 어겨도 된다거나 하지 않습니다기독교인도 인간이며 사회의 구성원이기 때문입니다철학행위는 인간에게 보편적인 행위이기 때문에 기독교인도 철학행위에 서툴 수는 있어도 아예 담쌓고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 철학활동은 더욱 중요합니다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믿음의 내용을 검토하지 않는 기독교인이 너무나 많습니다자신이 익숙해하는 특정한 교회의 문화관습 등을 마치 절대불변의 진리인양 착각하는 기독교인들도 많습니다심지어 교회에 이득을 주는 일을 위해서라면 범법행위를 묵인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기독교인들도 있습니다그러나내가 믿는 바가 정말로 옳은 것일까요만일 옳다면 근거는 무엇일까요내가 날마다 사용하는 개념과 용어그리고 표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다고 말할 있는 기독교인이 얼마나 될까요?


  이런 물음은 내가 가진 믿음을 버릴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내가 믿는 바의 내용을 풍성하고 깊이 있게 다질 것을 요구하는 물음들입니다본능과 습관에 이리저리 살아 가는 삶에 대해서 소크라테스는 “비판적으로 검토되지 않은 삶은 살만한 가치가 없다 말했습니다한국 기독교의 반지성주의적 신앙관과 폐해를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말을 귀담아 들어야 것입니다


  과학과 신학이 대화하기 위해서는 개념들에 대한 정교한 분석과 형이상학적인 문제들에 대한 진지한 탐구가 필요합니다철학이 없는 과학과 신학의 대화는 실제로 가능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대면 어떻고..신대면 어떻고..철이면 어떻겠습니까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개인적으로 과신대가 발음하기에 가장 깔끔하기에 맘에 듭니다중요한 점은 의미와 근거를 따져 묻고 답하는 가장 근본적인 행위로서의 철학 없이는 과학과 신학의 대화는 불가능하며 나아가 한국 기독교도 한국 사회도 건강해지지 못할 것이라는 점입니다의미와 근거에 대한 물음을 방해하고 차단하는 공동체와 사회는 독재와 부정부패비상식이 판치는 곳으로 전락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과신대 여러분 우리가 믿는 바를 검토해봅시다묻고 답하기를 게을리하지 맙시다.  그리고 성경 뿐만 아니라인류의 지성이 만들어낸 고전과 현대 과학을 편견 없이 수용하면서 그에 대한 답을 찾아나가는 ‘신앙인으로서의 지성사 써내려 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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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View Vol.2 / 2017.06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