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신대와 함께 하는 분들을 인터뷰를 통해 만나보는 시간
과신대 사람들


과신대 <기초과정I>을 수료하고, 이어서 <기초과정II>에 참여하고 계시는 오세조 목사님(팔복루터교회 담임)을 만났습니다. 알고 보니 생물학과 진화과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하신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계시더군요. 독특한 이력이 궁금해서 직접 만나 이러저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인터뷰어 | 최경환

인터뷰이 | 오세조

사진/글 | 최경환



Q: 목사님 간단한 소개 부탁합니다.


저는 대학에서 생물학을 전공했고, 석사 과정에서는 분자유전학을 전공했습니다. 그리고 박사에서는 의과대학에서 면역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미국으로 포닥 과정을 하다가 그곳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2013년에 루터신학대학원에 입학했습니다. 2017년에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준목을 하다가 갑자기 목사님이 사임하셔서 올해 7월에 안수를 받고 담임목회를 하게 됐습니다. 박사과정에서는 음식물 알러지에 대한 연구를 했습니다.


Q: 어쩌다 신학을 하시게 됐나요?


저의 신앙적 배경은 성결교입니다. 어려서부터 성결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하지만 생물을 전공하고, 석사에서도 ‘양서류의 종 분화’에 대한 것을 연구했습니다. 아버님이 목사님임에도 불구하고 저는 진화론을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관계가 어색해 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포닥을 할 때, 부모님께서 모두 돌아 가셨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할머니가 다 돌아가셨는데, 그때 의학이 별로 도움이 안 되더군요.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면서 그것을 심각하게 생각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10년 넘게 공부한 내용이 인간의 삶과 죽음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목회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봤습니다. 처음에는 자신이 없었습니다. 목회자가 되겠다는 저의 결정이 일시적인 것이지 주님의 소명인지 확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Q: 그런데 왜 하필 루터교회였나요?


저에게 성경을 가르쳐 주신 분이 계신데, 그분이 루터교 목사님이셨습니다. 그때 제가 성경에 눈을 떴습니다. 저는 루터신학을 공부한 것이 너무 좋았습니다. 낯설어서 좋았습니다. 저는 기존교회에서 아웃사이더였습니다. 한국의 전통적인 믿음이 저하고는 잘 안 맞더라고요. 너무 율법적이고 목사님을 너무 높이 보는 것이 싫었습니다. 루터신학을 공부하면서 저의 고민을 풀고, 같은 고민을 하는 그리스도인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한국에 루터교를 선교한 것은 미국의 미조리 시노드(Lutheran Church–Missouri Synod)였습니다. 굉장히 근본적인 시노드였고, 아마 젊은지구 창조론을 지지할 겁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신학교에는 신학적으로 열려 있는 분들이 많이 있으세요. 물론 보수적인 견해를 가진 분들도 많이 계시고요. 어느 신학교나 비슷하지 않을까 합니다.


루터교가 국내 선교를 한 것은 1958년이고, 국내에는 50여개의 교회 밖에 되지 않습니다. 저희는 기존 교회를 섬긴다는 마음으로 문서선교와 방송선교를 주로 했습니다. 베델성경연구가 유명하죠. 그러다가 교회를 늦게 시작했습니다. 총회에서 교회를 관리해서 개척을 지원해 줍니다.




Q: 과신대 기초과정 강의는 어떠셨나요?


사실 제가 기초과정을 두 번 들었습니다. 비가 억수같이 오는 날  4기 두번째 수업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첫 번째 수업을 안 들었기 때문에 5기 수업을 다시 들었죠. 수업 내용은 좋았습니다. 교회에서 할 수 없는 얘기들을 듣고, 같은 생각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서 좋았어요.


기억에 남는 것은 강의가 끝나고 어떤 친구가 했던 질문이 생각나요. 그 친구가 강의를 듣고 너무 좋았나 봐요. 그래서 이걸 교회에 가서 알려야 한다. 어떻게 하면 되냐? 질문 하더라고요. 그때 우종학 교수님께서 대답을 어떻게 해 주셨냐면, 질문으로 다시 바꾸셔서, ‘왜 굳이 이것을 교회에서 말하려고 하냐?’ 하셨어요. ‘기존 교인들과 이 문제로 갈등을 일으킬 필요가 없다. 오히려 신앙생활을 더 열심히 해라.’ 이렇게 조언을 해 주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어, 저건 목회자 마음인데’ 했죠. 굳이 교회에서 분쟁을 일으킬 필요가 없다는 거죠. 다만 우리는 교회에서 자라나는 새싹들에게 올바른 지식을 전달하면 된다고 하셨는데, 그 말이 제 기억에 남아요. ‘창세기 1장을 문자적으로 그대로 가르쳐라. 대신 아이들의 상상력을 막지 말라.’ 이런 말이 인상적이었어요.  


교리가 중요하기는 합니다. 하지만 교리가 화석화되면 안됩니다. 교리와 믿음에 대한 깊은 성찰이 필요합니다. 나의 고백이 있어야 하는데, 교리화된 믿음이 조금 답답합니다.


제가 요즘 수원남부 북클럽 준비를 위해 분당 북클럽 모임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진행하는지 배우러요. 그런데 모임에 참석하면서 ‘목회자들이 공부 안 하면 큰 일 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평신도들이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는데, 목사들 큰 일났다.’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옛날처럼 목회자가 권위만을 내세우면 안 되겠더군요. 평신도들의 신학 수준이 상당합니다. 평신도들이 보다 근원적이고 신학적인 질문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궁금해 합니다. 옛날 신학 가지고는 안 됩니다.


Q: 과신대에 기대하는 바를 말씀해 주세요. ‘앞으로 과신대가 이런 사역을 하면 좋겠다.’ 조언 한 말씀 해주세요.


과신대가 한국교회에 좋은 영향력을 미치면 좋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과학적인 관점에서 신학을 연구하고, 혹은 반대로 신학적인 관점에서 과학을 연구하는, 이 양쪽의 접근법을 모두 잘 소개해 주면 좋겠습니다. 또 과학과 신학의 대화가 더 튼튼해지려면 성경에 대한 깊은 이해가 더 필요해 보입니다. 성경관, 성경해석이 중요합니다. 너무 민감한 주제에만 집중되는 경향이 있는데, 오히려 기초적인 성경공부가 중요할 수 있습니다.


또 한편, 과학에 대한 공부를 진지하게 더 해야 합니다. 진화에 대해서도 너무 모르는 것이 많습니다. 양쪽 공부를 모두 해야 합니다. 어쩌면 과신대는 신학쪽 책들을 많이 읽는데, 북클럽에서 과학책을 더 읽으면 어떨까 합니다.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과신대와 함께 하는 분들을 인터뷰를 통해 만나보는 시간
과신대 사람들


2018년 8월 29일 서울신학대학교 정문 앞 카페 '이유'에서 과신대 자문위원이신 박영식 교수님(서울신대 조직신학)을 만났습니다. 최근에 『창조의 신학』(동연)이라는 책을 내셨는데, 그 책의 내용을 소개받는 시간이었습니다. 인터뷰 내용이 많아 두 번에 나눠서 소개합니다. 


인터뷰어 | 최경환

인터뷰이 | 박영식

사진/글 | 심기주




[과] 바벨론 포로 시기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말 흑암이 '이런  뜻하는 구나'라고 받아들였을지, 아니면 그냥 내러티브로 받아들였을지 궁금합니다.


[박] 개개인의 심리에 대해서는  모르겠지만  고대 세계의 표현방식사고방식을 우리는 은유라고도 얘기하고 신화라고도 얘기하지만, 당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았을  같아요당시 사람들에게는  표현이야말로 가장 자기들의 삶에 익숙한 표현이었다는 거죠실제로  세계를 혼돈의 세계흑암의 세계로 경험하는 거죠오늘날 우리는 홍수가 나면 여러 과학적인 관심을 갖고서 비가 몇 mm 왔는지, 어디가 침수지역이고, 어디가 안전한지 관찰하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그 자체가 세상이 무너지는 경험이거든요이거는 우리 지역은 홍수 나고  동네는 괜찮고가 아니고,  세상이 물에 덮인 거죠탈출구가 없는 거죠이게  아주 진정성 있는 표현보다  직접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해요우리가 흔히 창세기 1장이 바벨론 신화를 빌려왔다 어떻다 하지만,  바벨론 신화도 그 당시 현실 세계에 대한 반영이거든요그러니까 이게 그냥 문학 작품의 표현이 아니고 실제 경험 속에서 나오는 언어들이죠실제로 우리도 그런  있잖아요보통 때는 학문적인 이야기도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는 우리 속에서 나오는 언어들은 보다  1차적이고 근원적인 언어가 나오잖아요그런 언어들이라고  수가 있죠어쨌든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거는 성서의 언어들이 당시 사람들과 굉장히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언어지 오늘날 우리가 분석하듯이 2차적으로 은유인가 비유인가’ 이렇게 접근했던 언어는 아니었을 것이라는 겁니다그들이 직접 경험하고 있는 세계를 표현한 거죠.


[과] 책에서 진화를 다뤘는데해외에서는 신학자가 진화를 다루거나 설명할   부담이 없는데 우리는 아니잖아요. 신학자로서 진화를 언급할 때 부담스럽지 않으세요?^^


[박] 맞아요. 예전에 제가 강남의 어느 교회에서 목사님 어디 가셨다고 1부 예배부터 4부 예배까지 설교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는데, 그때 진화 얘기도 아니고 노아 홍수 이야기를 조금 하면서 '창조과학식으로 노아 홍수를 이해하는 것은  무리인  같다'라고 말했는데, 1부 예배가 끝나고 수석 부목사님이 올라오시더라고요. “목사님 그렇게 설교하시면 안됩니다앞으로 2, 3, 4부가 있는데 우리 교인들은 온누리교회 출신들이 많아요.” 그러셔서 알겠다고 했죠 있다가 다른 부목사님이 올라오신 거에요. “아휴 목사님 오늘 설교 너무 감사합니다이거 우리 청년들이 모두 들어야 할 설교라고 하시더라고요."  이러는 거에요교회 내에서 관심사들이  다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죠.


제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진화가 과학적으로 옳다 그르다' 그런  제가 주장해봤자 권위도 없고 알아주지도 않고(말이죠). 그게 아니라 진화라는 틀을 우리가 수용한다 하더라도 기독교 신앙을성서를 충분히 이해할  있다이게 서로 대립적으로 우리가 생각해야  요소는 아니다.’ 이걸 이야기하고 싶었던 거죠생물학자들마다 어디부터가 진화고 어디부터가 아니라고 말하겠지만, 제가   진화라는 단어가 주는 역동성이  속에  담겨있다고 봅니다.  역동성은 오늘날 우리가 세계를 이해할  굉장히 필요한 관점입니다. 더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살아 계신 하나님이고 창조를 하신 하나님이라고 했을 때는 진화가 주는 언어의 역동성을 우리가 충분히 수용할  있고 신학적으로 좀 더 생물학적인 의미와는 다른 빛깔을   있지 않을까 하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보고 있는 거지요.


그리고 이건 제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17세기 개신교 정통주의 신앙의 선배들도 루터와 칼빈의 전통을 이어서 신학적으로 체계화한 것입니다. 그분들이  창조론을 보면 창조를  가지로 나눴거든요. “태초의 창조(creatio originalis)”, “계속적 창조(creatio continua)”, “마지막 창조 또는  창조(creatio nova)”라고 해가지고 벌써  가지로 나눠놨어요이게 벌써 교리적으로 300~400  이야기인데, 우리는 창조할  태초의 창조 생각합니다그러나 이미 기독교 교리 속에 루터파 정통주의개혁파 정통주의 모두 계속되는 창조를 말해 왔거든요 계속되는 창조를 우리는 흔한 말로 '섭리'라고 하는데 섭리라는 말을 하면서 창조가 갖고 있는 풍성함이 사라졌다고 생각합니다아무 때나 섭리라고 써버리니까자기 뜻대로  건데 하나님의 섭리라고 해버리니까 말이죠그런데 사실 이게 창조의 관점에서 보면 주체는 하나님이잖아요내가 아니라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기 시작했고그리고 끝내버리는  아니라 계속 창조하고 계시고  창조를 완성하신다그러니까 창조주 하나님이 처음과 끝, 그리고 지금도 창조활동 속에서 행하신다는 이야기가 돼죠그런 관점에서 봐야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섭리보다 폭이 훨씬 넓고, 생물학적인 진화도 충분히 수용 가능합니다. 그런 패러다임이 이미 기독교 신학 안에 있는데 그걸 우리가 잊어버리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동안 구원을 너무 강조하다 보니까, '창조는 예전 얘기로 끝났고 우리는 지금 타락했고 그런데 이젠 구원받아야 하고그래서 중요한  구원이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사실 창조라는 패러다임은 끊긴 것이 아니라 계속되고 있는 창조 일어나고 있는 거죠저는  부분을 조금 강조하고 싶었던 거고요섭리라는 부분이 너무 우리 일상과 연관해서 자기 마음대로 작위적으로 사용되는 것도 방지해야겠습니다그래서 계속되는 창조가 굉장히 중요합니다계속되는 창조라는  단순히 우리 일상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세계라는 범위영역 전체를 포괄하는 창조라는 점에서 오늘날 환경문제 이런 것도 우리가 같이 고민할  있는 중요한 기틀이 되는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그런 면에서 창조는 끝나지 않았습니다창조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하나님은 계속 창조하시는 분입니다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가면은  틸리히 같은 사람은 창조를 "하나님의 창조적 힘이다!" 이렇게까지 말했죠여기에 몰트만 같은 사람은 약간 비판도 하지만  충분히 틸리히의 관점을 수용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지금도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도 끊임없이 하나님의 창조는 일어난다고 봅니다하나님의 섭리가 멈추지 않는다고 우리가 생각하듯이 하나님의 창조도 계속 일어나는 것이죠그런 면에서 창조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이야기가 아니라 사실은 바로  곁에 있는 사건입니다사실  분이 저를 찾아온 것도 창조적인 사건인 거죠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지금 만나서 밥 먹는 것도 창조적인 사건이죠내가 생각하지도 예상하지도 못한 이런 창조적인 사건들을 하나님은 끊임 없이 우리 속에서 같이 동행하면서  표현으로 하면 끊임없이 가능성의 창들을 열어놓고 계신다.”  그렇게 보고요그런 표현들이 중요한 것은 다시 돌아가서 무로부터의 창조, 혼돈으로부터의 창조처럼 우리에게 고난의 상황이 닥쳤을 때,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해 다른 방식으로 질문을 던지는 거죠. '하나님은 살아계신가? 하나님은  섭리하지 않으시지? 하나님은 일하시는가?' 이게  창조에 대한 질문인데, 그럴 때도 하나님은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수면 위에 운행하신다'  것처럼  수면 위에 계신 거죠. 거기 계시면서 하나님은 창조의 문을 열어놓으신 겁니고난 당한 사람은 우리가 흔히 절망한다고 하잖아요절망한다는  아무것도 안 보인다는 건데,   하나님은 새로운 문을 열어놓으시고 새로운 길을 열어 놓으세요 우리는 눈을 뜨고  길을  수도 있고 눈을 감을 수도 있고. 그러나 하나님은 창조의 문을 열어 놓으시고 지금까지 없던 길들을 보도록 유도하시고 인도하시고저는 그런 면에서 창조라는 것이 아주 거대한 세상없던 기계를 새로 발명하는 것뿐 아니라 우리 일상 속에서도 자잘한 일들 속에서도 창조가 익숙한 개념이 되었으면 좋겠다그런 생각입니다.



[과] 가장 중요한 주제일 듯 한데요. 창조나 환경을 강조하며 일상에 주어진 것들을 누리고 감사하며 사는 삶은 세상에 대해 너무 낭만주의적인 시각이 아닐까요? 지금 세상은 굉장히 불의하고 고통받고 어그러진 세상이라고 본다면, 여기에 저항하고 치유해야 한다는 관점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그러니 악과 고통하나님의 창조의 선함과 신비가 동시에 가잖아요 사이에서 대안을 설명해주실  있으실까요?


[박] 하나님은 새로운 질서를 계속 만들어내시는 분이지 정해놓은 질서에 우리를 붙잡아 두는 분이 아닙니다. 창조라는  옛날에 끝나버렸고, 만들어 놓은 틀에 맞춰서 돌아가야 하는게 아니죠.  하나님이 새로운 질서를 계속 만드신다고 봅니다. 그러면서  질서라는 개념은 창조라는 개념과 마찬가지로 과거로 회귀해야 할 개념이 아니라 새롭게 나아가야 할 개념으로 봅니다. 우리가 흔히 던지는, '하나님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셨다는데 악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도 물론 사변적으로 여러가지 대답할  있겠지만우리가 서있는 현실에서  질문을 다시 곱씹어보면 거꾸로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이렇게 악과 고통이 있는데, 과연 여기에 새로운 질서의 세계가 만들어질  있는가과연 여기에 창조가 가능한가?' 이렇게 질문했을  성서의 대답은 가능하다라는 거죠우리가 경험하는 악과 고통이 있는 현실세계는 하나님이 만들어가실 창조세계와 대결국면에 있고, 혹은 그런 과정 속에 있다고 보는 거죠. 그러나 그 세계가 현실세계를 뒷받침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우리가 현실에 순응하고 덮어두기보다는 우리가 이 땅을 극복하고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다고 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면 아름다운 것이 많아야 할텐데 악이 많은 이유는 뭘까요?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실 때 인간 뿐 아니라 모든 피조물에게도 자유를 주셨습니다. 모든 물리적 세게에도 자유가 있습니다. 실제 우리 세계는 인과율로 얽매여 있는 세계가 아니라 보다 우연적이고 자유로운 작용이 많은 세게입니다. 이런 자유로움이 많은 세계가 악이라는 예기치 못한 것의 근거가 될 수 있겠죠. 물론 선이 일어날 수 있는 근거도 될 수 있고요. 


우리의 물리세계는 마치 축구 경기와 같습니다. 축구경기를 볼 때, 감독이 직접 축구경기에 참여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축구경기가 감독의 영향 없이 진행되는 것은 아니잖아요. 마치 하나님은 감독과 같습니다. 물리 세계에서 보이진 않지만 그렇다고 없는 것도 아니죠. 손흥민이 골을 넣었을 때, 골을 넣는 과정은 축구장 안에서의 상호과정만으로 설명할 수 있지만, 거기에 감독의 작전과 영향이 없는 것은 아닌 것처럼, 하나님 없이 물리 세계의 현상을 설명할 수는 있지만 거기에 하나님의 일하심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거죠.


자유가 있어야 하나님이 우리는 사랑한다는 말이 가능하고,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도 의미가 있고, 또 인간의 삶 자체가 의미가 있습니다. 자유가 없다면 신학적인 논의도 다 의미가 없죠. 이미 짜여진 것을 되풀이하는 것밖에 되지 않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자유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유를 허용하고 그냥 내버려두신 것이 아니라 끊임 없이 창조 세계에 같이 참여하시면서 창조의 모험 속에 동참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과] 조직신학에 여러 주제들이 있는데, 그중에서 과학자들과 함께 연구할 수 있는 주제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박]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했을 때, 그것이 물리적으로 어떻게 가능한가를 연구할 수 있겠죠. 신학적으로 완전히 은유였다고 볼수도 있고, 그게 아니라면 그 당시 사람들이 부활을 보고 듣고 했다면 그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사실 '신령한 몸'이라는 용어 자체가 짬뽕이죠. 영이라는 말과 몸이라는 말이 결합되어 '신령한 몸'이라고 했는데, 이게 보통 몸은 아니니깐요. 종말의 때에 변화된 몸일텐데 그건 대체 어떤 몸일까요? 


또 어떤 이들은 최근에는 과학자나 생태학자들이 환경에 대해서 고민이 많은데, 왜 신학자들은 고민하지 않느냐고 묻더군요. 이 부분도 연구해야 할 주제라고 봅니다. 또 하나님이 세상을 섭리하신다고 할 때,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물어야 합니다. 이 물리 세계에 어떻게 개입하시는지 말이죠. 갑자기 하나님의 손이 나타나서 개입하나요? 아니면 물리 세계의 물리 법칙으로 섭리하나요? 같이 연구하면 재미있는 대화가 될 거 같군요.





이 글은 박영식 교수님과 진행한 인터뷰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바쁘신 중에도 인터뷰에 응해주신 박영식 교수님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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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View Vol.16 / 2018.09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과신대와 함께 하는 분들을 인터뷰를 통해 만나보는 시간
과신대 사람들



2018년 8월 29일 서울신학대학교 정문 앞 카페 '이유'에서 과신대 자문위원이신 박영식 교수님(서울신대 조직신학)을 만났습니다. 최근에 『창조의 신학』(동연)이라는 책을 내셨는데, 그 책의 내용을 소개받는 시간이었습니다. 인터뷰 내용이 많아 두 번에 나눠서 소개합니다. 

인터뷰어 | 최경환
인터뷰이 | 박영식
사진/글 | 심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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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이하 과)] 
안녕하세요, 박영식 교수님.


[박영식 교수 (이하 박)]
안녕하세요.


[과] 직신학의 주제가 여러가지인데, 그중에서도 창조에 원래 관심이 있으셨나요?


[박] 창조에 관심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고, 원래부터 관심이 있었다고 해도 거짓말인  같은데... 모르겠어요. 제가 이전에 야후 블로그를 운영했는데 그때도 제목이 창조, 생명이었거든요. 창조라고 하는 것이 저에겐 이상하게 중요한 주제였고, 독일에서 공부하면서도 창조라는 주제가 막연하게 성서 안에 있는 내용, 옛날 내용이기보다는 실생활에 가깝게 생각되었던 같아요.


[과] (이번에 새로 내신)  앞부분에 그런 부분이 나오더라고요. '성경을 읽거나 기독교 신학을 구성할 구원이나 구속에만 초점을 맞추다 보니까 창조는 오히려 굉장히 등한시되는 경향이 있다. (사람들의) 관심도 창세기 1-2장에만 잠깐 반짝이는데, 사실 신학적으로 중요하다.' 그런 얘기를 하셨던 같아요. 부분을 조금만 설명해주실 있나요?


[박] 저도 항상 우리 한국교회와 관련해서 질문하는 것들이 "타종교는 구원받느냐, 구원은 무엇인가"이고, 설교도 구원에 초점을 놓고 하지 창조를 갖고 설교하는 경우는 이상하게 거의 없어요. 그런데 의외로 성경에 창세기 1-2 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의 중요한 주제가 창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실제로 성경은 창조로부터 시작해서 창조로 끝나게 되는 책으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시작해서 요한계시록에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끝나거든요. 창조의 시작과 창조의 완성이랄까요. ‘창조의 거대한 구도 속에서 성경이 구성되어 있지 않은가.’ ‘실제로 하나님의 역사를 생각하더라도 창조로부터 시작해서 창조로 끝나는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까 우리 개신교 전통에서 구원을 너무 강조하다 보니 창조를 거의 설교하지 않으니 그런 살리는 필요하겠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1-2장을 봤을 때, 창조를 단지 옛날 이야기로 치부할 것이 아니고, 마치 우리 책의 서문 같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서문이 있고, 1, 2 전개가 때, 서문이 다른 모든 부분을 커버하게 될 수도 있잖아요물론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우리 성경 그런 구성에서 읽어볼 있지 않을까, 창세기 1장의 창조의 이야기가 시간 순서대로 가장 첫 단계, 출애굽기가 다음 단계, 이렇게 읽어나갈 것이 아니라, 사실 1 안에 성경 전체 하나님의 스토리와 히스토리가 포괄된 구조로 봐도 되지 않겠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된거죠.


실제로 제가 어디가서 창조 설교를 하면 낯설다고 해. 간혹 규모 있는 교회에 가서 창세기 놓고 설교를 하면 이렇게도 설교하시네요.’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도 있었고, 많이 낯설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쨌든 그냥 경험상으로도 창조 자체가 구원 이런 것보다 한국 교계에 관심사가 되지 못하고 과신대나 이렇게 과학 대화할 조금 관심이 있지 신학 전반적인 주제로서 관심사는 아니지 않나 그렇게 생각해요.




[과]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일단 우리가 창세기부터 시간순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우리의 관심이 온통 그럼 처음에 어떻게 되었다는 거야, 처음에 뭐가 있었어?” 이런 거에 집중되어 있잖아요. 우린 자꾸 실증주의적이고 과학주의적인 관점으로 성경을 보니까 뭔가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거랑 핀트가 맞는 거 같습니다. 우리의 관심이 아닌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뭔가요?


[박] 성서신학적인 관점에서 접근해서 풀어야 하는데, 흔히 말하는 창세기 1 이쪽 배경은 바벨론 포로 시기라고 보고, 나라를 잃고 설움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은 누구인가' 질문을 던졌을 겁니다. 우리 목사님들이 설교할 때도 여러 자료들을 활용하잖아요. 영화, 소설 . 마찬가지로 저는 성경도 그렇다고 생각해요.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들의 경험 세계 속에서 알고 있던 자료들, 바벨론 창조신화라든지, 이런 것들을 갖고 거죠. 그러나 그것이 이스라엘의 없던 창조 신앙을 만들어 낸 것은 아니고, 성서신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이미 이스라엘의 창조주 하나님을 고백하고 있었으나 고백할 있는 폼을 거기서 갖고 오되, 똑같이 갖고 오는 것이 아니라 비틀어서 자기들의 신앙을 거기에 담아서 표현했다는 거에요. 마치 목사님들이 설교할 드라마를 갖고 오면 드라마를 전달해주고 싶은 것이 아니라 설교에 이용해서 설교 내용을 전달하는 것처럼 말이죠


창세기 1장이 그런식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면 역사적 상황에서는 우리의 관심사처럼 옛날 옛날 하나님이 무엇을 하셨느냐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바벨론의 포로 상황에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누구신가?’ 질문이 중요한 것이죠. 창세기 1장을 읽어보면 나오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것이 바로 포로 상황에 있는 자신들의 상황이죠. 그럼에도 하나님은 수면 위에 운행하신다.” 여기서 물이라는 위험을 뜻하는 상징인데, 고대 근동에서, 노아 홍수도 그렇고, 예수님도 위를 걸으셨고, 계시록에 보면 새창조 바다가 사라져버려요. 고대인들에게 바다는 항상 위험요소였는데, 바로 그런 수면 위에 하나님은 운행하신다는 겁니다. 혼돈하고 공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활동하고 계신다는 거죠


그리고 하나님이 어둠 가운데서 빛을 비추신다. 이게 인간의 어떤 실존적인 상황과도 관련이 있다고 보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절망 가운데서 아무것도 전망이 없는, 한치 앞도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은 빛을 창조해 내시고 어둠을 가르시고. 다음에 아무 것도 디딜 없는 실존의 공허함 속에서 디딜 땅을 허락해주시고. 바다를 걷어내고. 디딜 땅을 주시고. 그리고 각각의 삶의 공간을 만들면서 하나님이 생명을 안에 집어넣잖아요. 이런 역동적인 그림들을 그리면서 우리는 "지금은 이런 어둠 속에 혼돈 속에 공허 속에 있지만 하나님이 결국 새로운 삶의 공간을 창조하시고, 명령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이런 명령까지 주신다"는 것을 있습니다. 삶의 새로운 세계에 대한 희망을 불어넣는 메시지가 창세기 1장의 메시지라는 겁니다 메세지는 여전히 우리에게도 유효합니다


성서의 창조의 이야기는 이러한 관점에서 반복되죠. 마치 출애굽의 이야기가 구약에서 계속 출애굽을 회상하면서 '기억하라' 하면서 출애굽의 동기가 반복되듯이 창조의 동기도 구약에 계속 반복됩니다. 시편에도 나오고, 이사야서에도 나오고. 이렇게 창조에 대한 동기를 계속 반복하는 창조와 구원의 관점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는 말하는 겁니다. (지금 한국 교계에서는 )우리는 구원만 얘기하고 창조는 조금 내려놨는데 창조라는 패러다임 속에 사실 구원이 들어가 있는 것이죠. 하나님이 새로운 지평을 열어놓으시고 새로운 공간을 열어놓으시고, 그런 관점에서 읽어야 된다고 보고요. 그런 관점이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고 타당하다고 봅니다


성서의 창조의 얘기는 창조의 과거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고 창조의 미래를 지시하는 것이에요. 미래에 대한 이야기. 그런데 미래가 2천년 미래가 아니라 지금 이제 앞으로 펼쳐질 미래라는 거죠. 바로 지금 하나님 때문에 새롭게 열릴, 창조될 미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창세기 1장의 창조 이야기에서 자꾸 고고학적인 질문 등을 하는데, 그런 쪽으로 가는 성서의 원래적인 의도와는 다르지 않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교리적으로 말하면 '무로부터의 창조냐, 혼돈으로부터의 창조냐'의 문제인데요. 어거스틴 이후로 교회 전통에서 무로부터의 창조가 정립되었는데, 또 오늘날 성서학자들이 성서를 보니깐, '땅이 혼돈하고' 등의 구절에서 볼 수 있듯이 혼돈으로부터의 창조가 아닌가 하는 주장이 있거든요. 그래서 이걸 양자택일 구도로 보는데, 사실 같은 거라고 본거에요. 삶의 관점에서 보면 극심한 혼돈 속에서는 무를 경험하거든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거에요. 자기한테 이상 디딜 땅이 없는 거에요. 자기 존재도 사실 무화가 되고. 자기 존재도 한없이 가엾고 의미 없는 존재로 아니라 자기가 살아가는 세상도 이상 아무 의미가 없는 거에요. 그러니까 실존적인 해석이죠. 무에요. 그러나 동시에 혼돈. 혼돈과 무로부터의 창조. 서로 양자택일이 아니라 인간의 경험 속에서 동일한 체험이고. 어쨌든 성서는 교리적으로 무로부터의 창조나 혼돈으로부터의 창조가 중요한 아니라 하나님은 거기서 창조하신다는 거죠. 그런 메시지가 로마서로 가면 죽은 자를 살린다. 없는 있게끔 한다. 그런 역동성과도 연관이 되죠. 그리스도의 부활과도 연관이 있고, 나중에 요한계시록에서 보여주는 역사의 미래와도 연관이 되는 거죠. 이렇게 사실 창조의 모티브는 과거에 갇혀 있는 아니라 끊임 없이 생동하고 실제론 우리의 속에서 굉장히 중요한 메시지로 읽을 있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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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사람들 (12) 박영식 교수 (2)에서 계속.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과신대와 함께 하는 분을 인터뷰로 만나보는 시간
과신대 사람들




7월 2일과 9일 2회에 걸쳐 과신대 기초과정이 서울대입구역 <더처치>에서 열렸다더운 날씨임에도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우리의 신앙을 더욱 견고하게 하기 위해서무신론의 도전으로부터 올바른 방향을 찾고 싶어서과학과 신학이 과연 대화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그저 지성의 힘을 키우기 위해서다양한 이유를 가진 이들이 모였다과신대 대표이신 우종학 교수의 강연은 다양한 이유와 필요로 모인 사람들의 마음을 시원케 했다이번 기초과정을 마치면서 소개하고 싶은 청년이 있었다과학주의 무신론자에 가까웠지만 이제는 교회를 다니게 되었다며 인사했던 눈망울이 큰 청년그 청년의 이야기가 궁금해서 과신대 백우인 기자가 만나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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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우인 기자 (이하 백)] 

반갑습니다본인 소개를 부탁드려요. 


[노재훈 학생 (이하 노)]

21살 대학생 노재훈입니다토목공학과에 재학 중인데 올해나 내년 3학년 마치고 군에 입대할 예정입니다.


[백] 기초과정 수료하셨지요축하드려요과신대 회원에도 가입을 하셨던데 계기가 있으셨어요?


[노] 저희 집은 무신론 가족이었습니다교회를 창조과학으로 인해 잘못된 지식을 갖고 있고 혐오로 점철된 곳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그런데 우종학 교수님이 페북에 올리신 글을 읽으면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교회에 나가게 되었고신학공부도 조금씩 하게 되었습니다과신대 추천 도서 중에서 <무신론 기자크리스천 과학자에게 따지다>와 알래스터 맥그라스의 책도 읽게 되었습니다과신대가 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되어 회원가입도 올해 초에 했습니다.


[백] 우 교수님께서 전도를 하셨군요이런 멋진 사건들이 우 교수님을 비롯해 우리 과신대 사역에 힘을 더해줍니다감사합니다제가 목회자다 보니 신앙생활에 대해 관심이 가는데처음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렸을 때 소감이 어떠셨어요신앙생활 가운데 어떤 소망을 갖고 계시나요?


[노] 장년부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모두 친절하고 잘 챙겨주고 따뜻하게 대해주셨습니다교회를 계속 다니면서 제 삶에 변화가 생기기를 바라고 특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다른 사람에게 신앙의 모범이 되는 모습으로 제가 변화되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백] 신앙의 모범이 되는 사람... 오로지 지혜만 구했던 솔로몬 왕이 생각나네요참 귀한 소망입니다예전엔 무신론의 입장이었다고 들었는데 하나님이 창조주로 믿어지시나요?


[노] 창세기 1장과 2장은 하나님이 우리의 창조주라는 것을 말하고 있고무에서 유로의 창조는 하나님이 없이는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저절로 하나님을 창조주로 고백하고 믿습니다.




[백] 무에서 유로의 창조가 '전무'인지 '상대적 무'인지 신학적으로 깊게 들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만, 본인의 신앙고백으로 여기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고 난 이후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노] 제가 무슨 말을 하거나 행동을 할 때 주변 사람들의 시선과 판단에 의존을 많이 했습니다그런데 이제는 하나님 생각을 먼저 하면서 행동을 하려고 합니다또 그리스도인으로서 사회에서 약자를 돕는 정의를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백] 사회적 정의저와 같은 생각을 갖고 계시네요하이파이브입니다!!! 과신대 얘기를 좀 더 나눠볼게요기초과정에서 유익한 점 혹은 기억에 남는 내용은 어떤 것이었나요?


[노] 교수님을 직접 뵈어서 좋았습니다. <과도기책 사인 받다가 저의 간증을 듣고 교수님께서 반응을 보여 주셔서 좋았습니다기억에 남는 내용은 평범성의 원리였습니다.


[백] ‘인간은 모두 평범하게 창조되었다그러나 우리 모두는 특별하다는 내용 말이죠?


[노] 창조의 방법이 평범하더라도 그 평범한 존재를 하나님이 계획하고 선택하고 인격적인 존재로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특별한 존재라는 말씀이 기억에 남습니다.


[백] 과신대가 어떤 단체라고 생각하는지 궁금합니다.


[노] 과학을 먼저 접했다가 신앙을 접하는 사람도 있고과학 때문에 신앙을 버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근본주의적인 신앙을 가진 분들 중에는 진화론이라는 얘기만 들어도 거부하거나 창조과학에서 이것은 틀렸어라고 지적하면 금방 신앙이 무너져버리는 사람들을 많이 봤습니다과학은 신앙에 도전이 되고대립구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과신대는 이런 많은 사람들에게 다리가 되어서 신앙을 굳건하게 하는 정말 중요한 사역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백]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으세요왜 그렇게 살고 싶으세요?


[노] 다른 사람에게 모범이 되고 비전을 주는 사람으로 살았으면 좋겠어요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이후로 주변에서 왜 교회에 다니냐고 물어요전혀 다닐 이유가 없거든요처음에는 그냥 모르겠다고 말했는데 생각해보니까 제가 아무렇게나 막 살면 사람들이 저를 욕하기 전에 교회 다니는 사람 전체를 욕하게 되잖아요그렇지만 제가 제대로 열심히 잘 살면 저의 모습을 보면서 다른 사람들이 은연중에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우선 저의 부모님부터 도요.


[백] 믿음을 삶으로 실천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 거군요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옥토 밭을 떠올려봤습니다참 좋은 마음의 밭믿음의 밭이 느껴집니다정의롭게실천하는귀한 성도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이 글은 노재훈 학생과 진행한 인터뷰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바쁘신 중에도 인터뷰에 응해주신 노재훈님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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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View Vol.15 / 2018.08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과신대와 함께 하는 분을 인터뷰로 만나보는 시간
과신대 사람들


이번 호의 주인공은 과신대 교육/출판 이사님이자 기자단 멤버인 백우인 목사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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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이하 과)] 날이 점차 더워지는데 어떻게 지내시나요? 

[백우인(이하 백)] 박사과정 1학기 기말 페이퍼 마무리하느라 부담감 안고 분주하게 지내고 있어요. 빨리 끝내고 방학을 맞고 싶어요. 

[과] 방학은 언제 들어도 신나는 단어죠. 더운 여름 시원한  곳에서 독서와 피서를 즐기는 경우도 많다던데 과신대 추천 도서 중에서 어떤 책을 권하고 싶으신가요?

[백] 과학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겪는 어려움은  과학 그 자체보다는 성경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생긴다고 생각됩니다. <과학시대의 도전과 기독교의 응답>에서  ‘성경은 누가 창조주인지,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지를 배울 수 있는 반면에 자연은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가 어떻게 펼쳐졌는지 배울 수 있으며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와 지식이 얼마나 풍성한지 배울 수 있다.’고 씌여 있습니다. 참 명쾌한 설명이죠? 주변에서 아무리 과학주의 무신론자들이 우리의 믿음을 흔들려고 하더라도 우리는 성서가 무엇을 말하려는지에 대해 정확한 앎이 있어야 합니다. 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계를 과학이 잘 설명해 줄 수 도 있으나 그것은 언제나 근사일 뿐이라는, 과학의 한계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과학시대의 도전과 기독교의 응답>은 우리시대의 과학적인 도전들 속에서, 특히 창조를 어떻게 해석하고 과학이 무엇인지에 대해 명확하게 기술하고 있기 때문에 적극 추천하고 싶네요. 

[과] 맞아요. 성경에 대한 이해가 참 중요합니다. 청소년들이 특히 과학과 교회서 배운 내용 사이에서 혼동을 많이 겪고 있습니다.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목회자로서  어떤 아이디어를 갖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백] 교회와 학교에서 배운 내용들로 인해 혼란스러워 하는 청소년들을 보면  참 안타깝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보여주시는 섭리와 자연을 통해 보여주시는 섭리가 상충되는 것이 아닌데도 자꾸 구분을 하고 과학-과학적인 결과물-을 믿으면 마치 신앙을 저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목회자들이 그들의 질문에 답을 해주지 않고 무조건 적인 믿음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저는 첫 번째로 청소년들에게 그들의 궁금증을 말하게 하고 그들의 질문에는 성서에 근거한 얘기들을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서에 근거한다고 할 때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근본주의적이고 문자주의적인 해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서가 쓰여 질 때의 시대와 문화적 환경 등의 이해를 바탕으로 한 설명이어야 합니다. 목회자들은 보다 더 철저하게 성서에서 말하려는 바를 제대로 연구해야겠습니다. 두 번째로는 우리 청소년들이 쉽게 듣고 이해할 수 있는 교육의 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과] 청소년을 위한 교육의 장을 말씀하셨는데  과신대에서 계획 중인 내용을 조금이라도 들을 수 있을까요?

[백]  우리 과신대에서 곧 청소년을 위한 과학 캠프를 개최하려고 진행 중에 있습니다. 청소년들의 눈높이에 맞게 성경을 이해하고 성경과 과학이 어떤 관계인지를 듣게 되고, 또 과학 실험을 통해 성서의 말씀을 조금 더 입체적으로 접해보는 시간도 계획하고 있습니다. 종교와 과학의 핫 이슈였던 지동설과 천동설을  연극으로 재현해봄으로써 그 시대의 과거로 돌아가 왜 그러한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는지를 알아보는 시간 등과 함께 크리스찬 과학자와의 멘토링도 계획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교육의 장을 통해 우리 청소년들이 과학과 신앙 사이에서 혼란스러워 하지 않고 믿음이 더욱 견고해지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과]  정말 유익한 사역이 되겠네요. 목사님께서 신학 대학생들과 함께 독서 모임을 진행하신 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독서모임에 어떤 마음의 소망을 갖고 계신지요?

[백] 빅뱅은 우주의 시작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고등학교 1학년 과학 교과서 1장에서 다루고 있어요. 그런데 아이러니 같은 일은 빅뱅을 가수 이름으로만 알고 있거나 아니면 그 조차도 모르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과학’이라고 하면 막연하게 어렵고 신앙과는 잘 맞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판넨베르크의 창조에 관한 이야기에 귀를 닫는 친구들도 있습니다. 이런 모습들을 보면서 과신대가 대학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차근차근 책을 읽고 생각 나눔을 하면서 무조건적인 반감이나 회피하는 사례 없이, 들어야 할 이야기에 귀를 열고  교정해야 할 사고에  유연성을 갖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계획하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귀하게 쓰여지길 기대하고 있고 함께할 도서는 앞 서 말씀드린  <과학시대의 도전과 기독교의 응답>입니다. 

[과]  청소년 캠프와 독서모임을 통해 과신대의 지경이 더 넓어지기를 기대해 봅니다.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작성 | 류인선, 과신대 기자단



이 글은 백우인 목사님과 진행한 인터뷰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바쁘신 중에도 인터뷰에 응해주신 백우인 목사님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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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View Vol.14 / 2018.07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과신대와 함께 하는 분을 인터뷰로 만나보는 시간
과신대 사람들


이번 호의 주인공은 과신대 자문위원 조성호 교수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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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이하 과)] 안녕하세요, 교수님. 간단한 자기소개 및 전공 분야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조성호(이하 조)]  네, 안녕하세요. 저는 서울신학대학교에서 기독교 리더십과 영성 신학 과목을 전공으로 가르치고 있는 조성호 교수입니다. 


[과]  교수님께서 처음 과신대와 함께 하시게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조] 과신대는 Facebook을 통해 우종학 박사님과 교류하면서, 또 과신대 회원들의 글을 읽으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과신대를 통하여 (실천)신학의 영역을 확대하고, 폭넓은 학문의 발전을 도모하고자 하여 함께하였습니다. 첫 공식적인 행사로는 동문인 박영식 교수가 대담자로 진행하였던 콜로퀴움(6회 차)에 참석하였습니다. 자주 참여해서 배우고 싶지만, 학교 일정 등 여러 일로 같이 하지 못하여 아쉽습니다.


[과] 최근에 과신대 자문위원이 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과신대 자문위원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조] 자문위원은 우 교수님이 부탁하셔서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자문위원이라고 해서 누군가를 자문해주기 보다는, 자문을 받아야겠다는 마음이 더 큽니다. 앞으로 많이 배워야겠습니다. (웃음) 


[과] 현재 신학대학교 내에서 신학 및 교양과목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과학·기술이 나날이 발전하는 이 시대에 신학생 혹은 기독교인에게 어떠한 자세와 행동이 필요할까요?


[조] 저는 이 시대의 과학이나 기술은 인문과학, 사회과학, 자연과학과 같이 분화하여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물론 나름의 전문적인 영역은 존재하지만), 학문의 영역에서 통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신학생이나 기독교인들이 평면적으로, 죽어있는 학문으로서 자신의 신학과 신앙을 가지는 것이 가져서는 안 됩니다. 변화되는 과학·기술뿐만 아니라 역사, 문화 등의 영역까지 자신의 신학과 신앙에 어떠한 시사점을 주는지 늘 성찰하는, 살아 있는 학문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한국교회와 성도들이 교권주의나 창조과학 등으로 혼란에 빠진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서라도, 열린 마음과 수용적인 태도로 이해하고 배우려는 자세가 신앙인들에게 필요하겠습니다. 


[과] 앞으로 과학과 신학과 관련하여 연구하고 싶으신 분야가 있는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조] 저는 과학 그 자체의 학문보다도 과학의 발전으로 인해서 나타난 사회·문화적 변화를 연구해보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순수과학처럼 과학만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으로 인하여 일어난 변화가 신학이나 그리스도인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과] 마지막으로 과신대 VIEW 독자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조] 저는 비록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지만 늘 ‘배우는 사람이다’라는 사실을 잊지 않습니다. ‘학자(學者)’라는 뜻도 결국 배우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수업 시간에 맡은 과목을 가르치기는 하지만, 본래 저 자신의 정체성은 배우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제가 과신대 활동에 참여하게 된다면, 저는 배우러 가는 것이지, 조금이라도 누구를 가르치려고 가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고, 토의하고, 서로의 것을 주고받는 시간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작성 | 이준봉, 과신대 기자단



이 글은 조성호 교수님과 진행한 인터뷰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바쁘신 중에도 인터뷰에 응해주신 조성호 교수님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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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View Vol.13 / 2018.06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과신대와 함께 하는 분을 인터뷰로 만나보는 시간
과신대 사람들


이번 호의 주인공은 과신대 대의원 정준 목사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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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이하 과)] 간단한 자기 소개 부탁드려요.


[정준(이하 정)] 저는 현재 과신대 독서모임이나 콜로키움, 과신대 교사모임 장소로 이용되고 있는 교회, 더처치의 담임목사입니다. 과신대와 인연을 맺게 된것은 2015년 페북을 통해 우종학 교수님과 페친을 맺으면서부터입니다. 제가 과학고를 나와서 공대를 다니다가 경영학과로 재입학하고, 졸업 후에는 신대원을 졸업해 목사가 되었습니다. 전공 편력이 심한 편인데, 사실 목사가 되어서도 신학과 과학, 과학과 신학의 문제는 중요하다는 인식이 자연스럽게 들더군요. 그런데 막상 목사가 되니깐 선제적으로 알고, 대응도 해야할 이런 부분에 너무 무지하고 심지어 준비가 안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어 과신대를 알게 된 것을 큰 기쁨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같은 고민을 하고, 또 좋은 지적 도전과 가이드를 받을 수 있어서 감사하더군요. 


[과] 목사님께서 설교하실 때  창세기와 관련해서 불편함을 느끼거나 성도님들로부터 질문을 받는 부분이 있다면 어떤 것들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정] 목회 현장에서 보면 사실 드러내놓고 창세기에 관련한 질문을 하는 분들이 많지는 않아요. 한국의 교인들은 일단 성경에 쓰여져 있는 부분은 일단 의심없이 믿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니까요. 물론 그런 생각은 그렇게 가르침을 받아왔기 때문이겠구요. 그래도 더러는 이런 질문들을 받게 되죠. 창세기가 자세히 설명하지 않은 부분들, 이해가 안되거나 믿기지 않는 부분들 말이에요. 

정말 6일만에 온 우주만물들이 만들어졌을까? 아담과 하와가 최초의 사람이라면, 그 아들들은 누구랑 결혼했을까? 진짜 그 때에는 사람이 900년 넘도록 살았을까? 등등... 

최근에 안수집사님 한 분이 이런 문제에 대해 저와 질문과 격론을 벌이신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절 보고 창세기를 부정하고 하나님의 기적적인 창조를 믿지 않고, 창세기에 명백히 기록된 내용을 함부로 해석한다며 성경해석과 설교 코드에 동의하지 못하겠다며 교회를 안나오시게 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시작과 발단은 6일창조와 무에서 유의 창조에 관한 의견차이였는데(그 분은 오직 성경에 나온 문자 그대로만 믿어야 한다 vs. 저는 창세기의 기록은 당시 우주와 세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무엇을 전하려고 하는지 필요하다면 당시의 신화적, 상징적 체계로 읽고 해석해야 한다) 급기야 므두셀레가 969세 산 것을 왜 그대로 믿지 않느냐는 문제로 확대되었죠. 사람이 천수를 누리지 못하는 유한한 존재임을 확인시켜주는 본문으로 읽을 수 있어야 한다며 너무 문자 자체에 집중하지 마시라 권면드렸습니다. 결국은 성경을 있는 그대로 믿고 보지 못한다면 예수님의 치유 이적과 부활은 어떻게 믿겠느냐며 도저히 제 얘길 듣지 않으시려 하더군요. 이런 아픔이 있었습니다. 아마 목회적 성공, 교회의 수적 부흥을 위해서는 창세기는 너무 깊이 안 건드리는 것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지와 오해는 그대로 둘 수 없는 부분이 있기에 이것이 딜레마죠.


[과] 과신대에서 '목회자  창조과학에 답하다'는 주제로 7회 콜로퀴움이 열렸었는데  목회자의  입장에서  이러한 과신대의 사역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듣고싶습니다.


[정] 개인적으로 이번 콜로키움은 참 좋았습니다. 문제는 교회를 현재 불출석하고 있는 그 집사님이 꼭 오셨으면 했는데, 안 오셨다는 것이 아쉬웠죠. 따지고 보면 그 집사님도 피해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분에게 창세기와 성경을 어떤 방식으로 읽고 해석해야 하는지 처음 가이드를 해주신 분이 저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대부분의 한국교회가 그렇긴 하지만요. 저는 과신대가 목회자들에게 적어도 창세기의 창조사건에 관한 과학과 신학적 소양을 제고하는데 역할을 감당해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교회는 목사님의 설교와 가르침이 바뀌어야 양육받는 성도들이 달라지니까요.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의 문제 같은데, 목회자가 변해야 성도들이 변하고, 성도들이 변해야 목회자도 변하는 것이겠죠. 다만 저는 목사라서 그런지 목회자들이 더 앞서서 이런 지적 소양을 갖추고, 과학과 신학에 대한 탐구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 면에서 과신대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과]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해 사람이 설 자리가 축소될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혹자는 종교는 마지막까지 살아남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종교(특별히  기독교)가 과학시대에 요청받는 것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시는지 듣고 싶습니다.


[정] 글쎄요. 저는 종교의 역할(기독교의 역할)이 더 줄어든다고 보진 않습니다. 과학의 발전이 종교의 역할과 수준에 대해 성찰할 수 있는 계기를 주는 것이죠. 사람들의 설 자리가 축소되기보다는 이전보다 훨씬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가와 같은 질문을 더 많이 하게 되지 않을까요? 이것은 철학적이면서 종교적인 질문이고,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이에 대한 답은 과학만으로는 답해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종교개혁은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리로, 인간은 인간의 자리로’, 결국 인간을 하나님의 자리에서 인간이라는 본연의 자리로 돌려놓았듯, 과학이 발달할수록 기독교가 과학의 영역까지 침범하거나 과학 위에 서려하지 말고, 과학의 결과물을 수용하면서, 기독교는 본질적인 역할에 충실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나님이 가르치신 참 사람다움이란 무엇인가? 사람은 무엇을 해야 가치있는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은 어떤 삶인가? 등 이런 가이드의 역할은 종교(기독교)만 할 수 있다고 봅니다.


[과] 과신대 북클럽이 서울 남부지역 과 분당/판교, 전주, 제주도 등 여러 곳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북클럽이 더욱 활성화되기를 바라는 가운데 살짝 권유를 하신다면 어떤 부분이 있는지요? 

[정] 지금도 잘 하고 있지 않은가요?  다만 독서모임이 진행되면 아무래도 처음 입문자와 꾸준히 관련 책을 몇 년간 읽어온 사람과는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잖아요. 그래서 독서모임은 점점 더 어려운 책을 택할 수 있는 위험성도... 과신대 제자 양육 시스템을 도입해야할까요? (웃음) 결국 다양성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독서모임이 각 지역별로 진행, 확대되고 있다면 이제는 다양한 수준의 다양한 모임들로 확산될 필요도 있다고 봅니다. 신앙생활도 혼자보다는 교회라는 공동체가 필요하듯이 책도 혼자보다는 같이 읽는 것이 훨씬 좋다고 봅니다. 단순한 지식 축적만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감에 있어 더불어 함께 걷는 길동무를 얻고 연대해가는 힘이 과신대 독서모임에서 시작된다고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작성 | 백우인, 과신대 기자단



이 글은 정준 목사님과 진행한 인터뷰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바쁘신 중에도 인터뷰에 응해주신 정준 목사님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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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View Vol.12 / 2018.05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과신대와 함께 하는 분을 인터뷰로 만나보는 시간
과신대 사람들


이번 호의 주인공은 과신대 대의원 한은애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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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이하 과)] 회원님의 소개와 과신대에 참여하게 된 동기는 어떤 것인지 궁금합니다.


[한은애(이하 한)] 안녕하세요, 저는 과신대 남부 북클럽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은애입니다. 서울대학교 교육상담 전공에서 석사 학위를 마쳤고, 현재는 박사과정 진학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상담사로 구립 청소년 상담센터와 교회에서 근무도 하고 있습니다. 지난 2016년 겨울에 총신대학교에서 우종학 교수님의 강의가 급작스럽게 취소된 일이 있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교수님께서 더처치에서 특강을 열어 주셔서 처음으로 과학과 신앙에 대한 강의를 접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곧 바로 열린 제 2회 포럼에 참석하며 과신대를 알게 되었습니다. 2회 포럼 때, 이전까지 괴리를 느껴 온 심리학 지식과 새로운 신학의 해석이 조화가 되면서 느꼈던 짜릿함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과] 과신대 독서 모임에 함께 한지 1년이 넘었지요? 모임을 통해 어떤 부분의 관점변화가 있었는지 말씀 듣고 싶습니다. 


[한] 저는 인문 사회과학에 익숙한 사람이지만, 독서모임을 통해 양질의 자연과학지식을 접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성경 해석과 믿음에 대한 관점이 많이 변했습니다. 이 전에는 성경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읽히는 대로 믿어야 한다는 문자주의적 사고에 익숙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임을 통해 성경 또한 다른 책들처럼, 폭넓은 맥락에서 성실한 해석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만약 문자 그대로 성경을 읽고 의심 없이 믿어야 하는 것이 바른 신앙이라고 생각해 왔다면, 저는 지금쯤 믿음을 잃어버렸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성경이 우리 사회의 소수자들을 공격하고 혐오하는 일에 자주, 효과적으로 쓰이니까요. 그렇지만 과신대 덕분에 이런 고민들을 함께 나누고, 믿음을 확고하게 하는 과정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과] 과신대의 사역이 점점 지경이 넓어지고 있습니다. 과신대가 지향하는 방향성이 개인에게 혹은 공동체에 어떤 의미가 있다고 생각이 되시는지요?  


[한] 저와 같이 성경과 교회, 믿음에 대한 의문을 해결할 수 없어서 신앙을 포기해야 할지 고민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과신대는 자신을 부정하지 않고 신앙을 지켜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새롭고 산 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더불어 개인의 믿음에만 국한되지 않고, 한국 교회와 신앙 공동체의 건강한 성장을 위해서도 과신대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저에게 과신대는 여러 의문들을 보다 더 자유롭게 나눌 수 있고, 혼자만 가지고 있는 줄 알았던 괴리들을 이미 고민해 오셨던 좋은 선생님, 선배와 동료들을 만날 수 있는 장입니다. 


[과] 최근에 과신대 대의원에 추대되셨는데 축하드리고 귀한 섬김에 감사드립니다. 과신대에 바라는 점이나 회원님의 하시는 일과 관련하여 아이디어를 제공해주신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한] 제게 과신대의 성장을 옆에서 지켜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 정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아직도 많은 분들이 제가 과신대를 알기 이 전에 가지고 있던 의문들로 힘들어 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일 년 동안 저에게는 익숙해지고 편안해진 관점들이라, 이미 많은 분들이 과신대 운동과 비전을 접해보셨을 것이라고 저도 모르게 생각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저는 과신대가 오랫동안 더 많은 분들에게 전해질 수 있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직 전해야 할 곳이 많다고 해야 할까요? 그 길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제가 최대한 돕고 싶습니다. 


[과] 아직 전해야 할 곳이 많다는 말씀에 우리 과신대가 오늘도 가야하는 “사명의 길”, “새롭고 산길”을 위해 기도하게 됩니다. 동역자로서의 귀한 섬김의 마음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리며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작성 | 백우인, 과신대 기자단



이 글은 한은애님과 진행한 인터뷰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바쁘신 중에도 인터뷰에 응해주신 한은애님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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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View Vol.11 / 2018.04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과신대와 함께 하는 분들을 인터뷰를 통해 만나보는 시간
과신대 사람들


이번 호의 주인공은 서울남부 북클럽 회원 최자인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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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이하 과)] 본인의 소개를 간단히 부탁드립니다.


[최자인(이하 최)] 안녕하세요. 저는 서울대학교 외교학전공 석사과정 2학기 재학 중인 최자인입니다. 공부를 따라가는 것을 버거워하고 있고 ... 예수님의 복음이 주는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 궁금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여정 가운데 있습니다.

[과] 서울남부 북클럽 모임을 알게 된 경위와 참여하게 된 동기를 소개해 주세요.

[최] 저희 과 안에는 윤영관 교수님을 중심으로 하여 일주일에 한 번씩 팀 켈러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나누는 '지혜모임'이 있습니다.  제가 희수 언니(서울남부 북클럽 회원)를 만나게 된 곳이었어요. 그 곳에서 희수 언니가 깊고 끈기 있게 사고하는 모습을 보면서 언니에 대한 궁금증과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후 언니와 대화하면서 서울남부 북클럽 모임을 알게 됐습니다.

[과] 3개월 정도 꾸준히 참여하고 계신데 소감이 있다면?

[최] 먼저 3개월 정도의 참여라는 것이 3번 정도 나간 것 밖에 되지 않아서 소감을 나누기에 약간의 민망한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도 나누자면 진리를 깨달아 가는 것에 다양한 길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과신대 모임에 참여하면서 제가 생각보다 이분법적이고 극단적인 사고를 즐겨 했던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주로 진리를 알아가고자 하는 다양한 방법들 가운데 어느 것도 정답이라고 말하기가 어렵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성경이라는 틀 안에서 다양한 추론을 해 볼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한 마음도 들었습니다. 

[과] 과신대에서 대중과 소통하기 위해 포럼과 콜로퀴움, 그리고 교육과정 등이 진행되고 있는데 이러한 과신대의 사역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최] 먼저는 제가 과신대의 사역을 경험한 기간이 길지 않기 때문에 많은 점을 이야기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다만 과신대의 사역이 '개방성'을 지향하는 것 같다고 느꼈고, 그렇기에 그것이 과신대만의 특징과 장점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한국사회에서 다양한 목소리를 표출해 나가는 것이 우리 사회가 가진 배타성이라는 특성 때문에 쉽지만은 않은 길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과신대 사역은 기존의 것에서 벗어나 또 다른 목소리를 내주는 것 같아서 감사했습니다. 연역과 귀납을 통해 특정 학문을 더 많이 알아갈 수 있듯이, 과신대는 신학과 과학 간의 소통을 마련함으로 하나님을 더 많이 알아갈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 과신대가 나아갈 방향이나 북클럽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최] 과신대가 과신대의 자리를 묵묵히 잘 지켜나가 주었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과신대 화이팅 :)


작성 | 백우인, 과신대 기자단



이 글은 최자인님과 진행한 인터뷰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바쁘신 중에도 인터뷰에 응해주신 최자인님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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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View Vol.10 / 2018.03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과신대와 함께 하는 분들을 인터뷰를 통해 만나보는 시간
과신대 사람들


이번 호의 주인공은 현재 과신대 자문위원으로 계신 제주대학교 팽동국 교수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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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이하 과)] 한파가 계속되는 날씨입니다. 건강을 기원하며 교수님의 간단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팽동국 교수(이하 팽)] 저는 제주대학교 해양 시스템 공학과에서 음향학을 가르치고 있고 의료용 초음파와 수중음향에 대해서 연구하고 있습니다. 학부에서 해양을 전공했고 석사로 물리해양과 수중 음향 그리고 박사 때 의료용 초음파를 전공하게 되었습니다. 교회 생활은 초등학교 고학년 때 시골에서 서울로 유학 오게 되면서 다니게 되었고 중고등부 시절을 지나 교회 생활과 신앙의 기초가  쌓여졌으나 대학에 와서 사회문제와 정의 독재와 교회의 역할 등의 문제로 회의와 방황을 하다가 1990년도부터 남서울 교회 청년부를 다니면서 새롭게 인격적인 하나님을 만나고 미국 보스톤과 펜실베니아 스테이트 컬리지, 로스엔젤레스에서 유학하는 동안 지역교회에도 속해 있었지만 코스타 집회도 참석하며 섬겼고, 2003년에 제주대학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과] 교수님의 청년 시절의 고민의 내용과 모습이 지금 우리 모두의 것으로 느껴집니다. 과신대에 어떻게 참여하게 되셨는지  궁금하고 제주도에  진행 중인 북클럽 모임에 대해서도 소감이랄까요? (혹은  모임을 결성하고 변화의 모습을 나눠주시면 좋겠습니다. )


[팽] 우종학 교수와는 세기말부터 거의 매년 코스타 집회에서 만나서 같이 동역하고 섬기고 있었습니다. 우 교수는 코스타 첫 참석 때부터 신앙과 학문의 통합 같은 중요한 문제 제기를 했었고 그 계기로 그 일을 책임지고 섬기는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당시 창조과학에 기반을 둔 생각을 하고는 있었지만 몇 가지 근본적으로 궁금한 사항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 창조과학에서는 부분적인 것만을 비판하지만 거시적인 패러다임이라던가 체계를 만들지 못하는 부분이 있어서 아쉬움과 그 한계를 깨닫고 있었습니다. 그 때 마침 미국 캠퍼스 사역자 한 분의 소개로 물리학자라고 소개한 모리스의 소책자를 통해서 6일 창조 가능성을 얘기하는 우주 물리에 대한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2000년 초, 저녁 집회가 끝난 밤 10시쯤 우교수와 둘이서 얘기가 시작되어 거의 밤새워서 질문하고 답했던 기억이 아직도 강하게 남아있습니다. 지금도 그랬지만 그 때도 책 제목을 몰라서 나중에 그 책을 보내준다고 했고 보내준지는 기억을 못하겠지만 그 책에 대한 답은 우교수에게 한 마디로 들었던 기억이 아직도 납니다. ‘그 책의 모든 내용은 가장 기본적인 중력의 법칙을 무시한 가정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학계에서는 전혀 받아들여질 수 없는 내용이다’ 그 뒤로도 가끔씩 이런 내용을 얘기하곤 했었는데 2007년인가 제가 LA에 연구교수로 가 있을 때 샌프란시스코에서 모임이 있었는데 거기서 우교수와 같이 차를 타고 오가며 다시 여러 궁금한 점들을 물어가면서 창조과학의 한계와 문제점을 알게 되고 여러 다른 복음적인 해석 방법이 있다는 것을 충분히 공감하게 되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때 이런 내용을 책으로 쓸 예정이라고 해서 적극 지지한다고 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무끄따 책이 나오더군요. 우교수 책의 초안을 읽고 그동안 읽었던 하아스마 부부의 오리진 책과 비교해서 간단한 몇 가지 제안을 했었는데 덕분에 별로 한 일 없이 감사의 글에 제 이름이 언급되었지요. 그 후에도 십 수년을 서울과 제주에서 기회 될 때 마다 만나며 대화를 나누며 과신대에 대한 계획과 일정들에 대한 얘기를 들었고 적극 지지자로서 저의 바뀐 생각과 경험들에 비추어 격려도 하고 중요성도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제주에 있어서 한계가 있기에 직접적으로 도와주지도 못하고 소식만 듣고 있어서, 무엇이던지 도움이 될 만한 일이 있으면 돕겠다고 했더니 자연과학 전공자도 아닌데 자문위원에 제 이름이 올려져 있었습니다. 제주에 있다보니 모임에도 못 가고 아무 일도 안하며 자문 위원으로 있자니 맘도 편하지 않아 이런 저런 궁리를 하다가 북클럽 지방 모임 하는 것을 보고 제주 모임을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교수 만나서 자연과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이 적극적으로 과신대 모임을 주도적으로 하는 것에 대한 의견을 물어보려 했었는데 어느 날 페이스북에 몇 년 전에 학생들과 책나눔 모임을 하면서 우교수의 무끄따 책을 함께 읽고 제주 방문 일정에 맞추어 모임에 초청 하고 저자와의 만남을 주선하고 찍었던 사진이 떠 올라, 바로 제주 모임에 대한 생각을 페북을 통해서 밝히며 2~3 사람만 모여도 하려고 했더니 7분이나 적극적으로 답을 해서 작년 11월 1일에 첫 모임을 하게 되었습니다.

첫 모임을 하면서 창조과학에서 ‘회심’-회의가 들고 생각이 바뀌게 된 경험들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는데 다양한 경험과 신앙 여정에서 자연스럽게 서서히 혹은 특정한 계기로 짧고 격렬하게 바뀌었던 자신의 시각들을 나누었는데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고민과 답을 찾으려고 하는 평신도 뿐 아니라 젊은 목회자 분들도 참여했다는 사실이 고무적이고 신선했습니다. 그런데 목사 또 교수라는 직함으로 서로 부르거나 불려지면 그렇지 않은 평신도 입장에서 자유로운 생각을 나누기 어려울 수도 있다는 생각에 어색해도 우리 모임에서는 모든 직함 빼고 그냥 형제 자매 혹은 성도로 부르기로 정하였습니다. 세 번 만났는데도 아직도 적응이 안 되어 직함이 툭 튀어 나오기도 하고 아직도 어색해서 직함과 호칭을 거의 부르지 않는 폐단도 있기는 하지만 나름 의미 있는 일인 것 같습니다. 어린 아이도 있고 바쁘기도 한 상황임에도 서귀포 애월 삼양 신제주 구제주 등 생각보다 멀리 퍼져 있어서 운전하는 시간이 꽤 됨에도 아이들 데리고 오는 부부도 있고 아르바이트 일정 조정해서 오기도 하고 아이 맡기고 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세 번 모임 모두 얘기하다 보면 3시간도 모자랄 정도로 풍성하면서도 아쉬움을 느끼는 열기가 있습니다. 지금 현재 하아스마 부부의 오리진 책의 각 장을 읽고 한 사람이 가능한 짧게 발제하고 서로 질문하고 토론하고 생각을 나누는 시간을 갖고 있고 장소는 제주 반석교회에서 모이고 있습니다.


[과] 거룩한 부담감이 제주 북클럽을 만들게 하고 귀한 사역으로 이어지게 되었네요. 과학 기술이  발전하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교회가 지향해야 할 모습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청소년들의 논리적이고 지성적인 질문들-과학과 관련된-에 답하기 위한 노력과 관점은 무엇이 있을까요?)


[팽] 인지과학이 발달하고 양자 생물학 등의  연구 결과물들은 신앙의 기본을 흔들기도 합니다. 자유의지가 있는지, 신앙이 유전자에 의해 가능한지, 등등 성도들에게  질문이 생깁니다.

어려운 질문이고 저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답할 전문가도 아니고 지식도 부족합니다. 다만 한 가지 드는 생각은 과학기술 발전에 대한 두려움으로 기독 신앙인들이 움츠려들거나 지나치게 방어적이거나 강한 거부를 할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해 있기에 궁극적으로 과학기술 발전을 하게 되면 창조주이자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더 드러날 것을 신뢰해야 될 것 같습니다. 또한 반대로 과학적 무신론이나 과학만능주의에 너무 쉽게 빠지거나 양보해서 성경 내용을 가볍게 여기거나 너무 쉽게 왜곡하거나 소홀히 하지 않아야 될 것 같습니다.


[과] 과신대가  추구하는 사역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지 궁금하고 더 필요한 사역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팽] 과신대가 창조과학에 대항하는 유신론적 진화과학이라는 이름이나 그런 것을 지향하는 모임이었다면 저는 아마 관심자였을 수는 있지만 참여는 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과학과 신학의 대화라는 이름과 지향하는 점에서 보다 근원적이고 궁극적인 문제인 과학 시대에 성경을 어떻게 읽고 이해하고 해석해야 하는지의 보다 본질적인 문제에 접근한다고 생각되었기에 적극적인 참여자가 되었습니다. 과학의 발달로 자연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는 이 시대에 그리고 인지과학 유전공학 로봇공학 등 인간과 생물에 대한 관점이나 정의 자체가 부분적으로 바뀔 수도 있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현재 이전 시대에서는 경험해 보지 못했던 빠른 변화 가운데 살아가고 있고 거의 매일 새롭게 밝혀지는 과학적 사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이런 변화는 더 가속화 될 것입니다. 이러한 시대에 성경의 문자적인 내용과 상충되어 보이는 혹은 성경에 전혀 언급되지 않은 미묘한 문제들을 만나게 되는데 이럴 때 어떻게 성경적 신학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하여 창조주 하나님에 대해서 더 알아가는 문제는 매우 중요한 것 같습니다. 몇 천 년 전에 특정한 상황의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에게 들려진 하나님 말씀인 성경을 읽고 우리조차도 변화는 속도에 적응해 나가기 버거운 이 시대에 어떻게 그 말씀을 읽고 이해하고 해석해서 이 시대에 적용할 것인지 하는 문제는 생각보다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과학과 기술뿐만 아니라 사회와 문화 경제 등 모든 부분에서 변화의 속도가 급속도로 빨라지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국가와 사회와 개인, 가족과 결혼과 성, 교회와 예배의 형태 등 다양한 문제들에서도 마찬가지로 다변화 되어 가고 있는 이 시대에 어떻게 성경을 통해 본질과 진리를 손상시키지 않으면서도 이 변화되고 다양화된 시대에 적응하여 효과적으로 성경적 진리를 밝히 드러내는데 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과신대 모임이 되지 않을까 기대해 봅니다. 최근에 교회의 타락과 교조적인 모습에 환멸을 느끼는 청년들과 젊은이들에게 과학기술 시대에 오히려 더 성경적 진리를 알아가야 하고 그 진리가 더 풍성해 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이는 사역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더 나아가 다변화된 사회에서도 그 진리는 여전히 중요하고 빛이 더 날 수 있다는 소망을 바라보게 하는 모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더 밝히 알게 된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 아니 나의 삶의 현장에서 실천할 수 있는 그런 과신대 모임이 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시작해서 먼저 기반을 잘 닦은 다음에 인문 사회 경제 등의 문제들까지도 확장되거나 연합할 수 있는 과신대가 되면 더 좋겠습니다.


작성 | 백우인, 과신대 기자단



이 글은 팽동국 교수님과 진행한 인터뷰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바쁘신 중에도 인터뷰에 응해주신 팽동국 교수님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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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View Vol.09 / 2018.02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