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늦가을 국립중앙도서관 근처 카페에서 김흡영 교수님을 만났습니다. 김흡영 교수님은 강남대학교에서 오랜 시간 종교 간의 대화, 종교와 과학의 대화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신 국내 1세대 과학신학자입니다. 꾸준히 해외 저널과 저서에 글을 기고하시고 최근에는 트랜스휴머니즘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신다고 합니다.  


인터뷰어 | 최경환 실장

인터뷰이 | 김흡영 교수

사진/글 | 최경환 실장



1. 교수님은 언제부터 과학과 신학의 대화에 관심을 갖게 됐는지요?
  
본래 저는 서울대학교 공대를 나왔고, 과학자가 되려고 했습니다. 한국 최초의 우주인이 되고 싶었죠. 나중에는 우주에 못 가지만, 영적인 우주인이 되어야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미국에서 공부를 하다가 신학을 공부하게 됐고, Graduate Theological Union에 가서 과학신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학교에 The Center for Theology and the Natural Sciences라는 연구소가 있는데, 그곳에서 Robert John Russell과 Ted Peters을 만났습니다. 이분들이 저의 스승이자 친구입니다. 이분들과 함께 전 세계 대학에 종교와 과학에 대한 과목을 개설하는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저는 아시아 지부를 맡아서 한국의 4개 대학(장신대, 한신대, 서울신대, 호신대) 종교와 과학 정규 과목을 개설하도록 도왔습니다.
  
그동안 종교와 과학의 대화는 주로 서구 신학을 기반으로 연구가 진행됐습니다. 서구적인 맥락에서는 신학과 과학이 분리가 안 됩니다. 둘 다 서구적인 학문입니다.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도 결국 과학적인 사고입니다. 하지만 저는 진정한 종교와 과학의 대화는 초자연과 자연이라는 이원론을 극복한 동양적 사고에서 지혜를 얻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둘의 간극을 극복한 것이 동아시아 전통에서는 도교와 유교였고, 이 두 전통은 자연 안에 이미 초월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초월적 내재를 말하고 있죠. 서구 신학에서는 이 둘이 같이 가기 어렵죠. 그래서 저는 동양신학, 특히 한국신학적인 입장에서 서양신학이 가지 못하는 새로운 모형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랬더니 서구의 학자들이 종교와 과학의 대화나 생태신학에 대한 논의가 나오면 지속적으로 저한테 원고를 의뢰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도 꾸준하게 1년에 2-3개씩 글 요청이 들어옵니다. 지금 생각하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이 분야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2. 신학과 과학이 어떻게 대화해야 할까요? 평소 교수님의 생각을 말씀해 주세요.
  
신학이라는 것은 전체적인 것입니다. 비기독교적인 토양 속에서 혹은 기독교적인 토양 속에서 과거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 또 현재의 신학, 그리고 미래의 문제를 모두 연결해서 연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 신학은 과거를 잘 배우지도 않고, 미래를 이끌어 가는 과학도 잘 배우질 않습니다. 서양의 신학만을 번역하고 공부하기 바쁘죠. 
  
무엇보다 대화가 중요합니다. 대화의 기본은 자기 입장을 고집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가 정답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대화가 안 됩니다. 서로 열린 입장에서 담을 허물고 대화를 해야 합니다. 대화에 들어가면, 전도를 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그렇다고 자신의 신앙을 포기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자신의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일단 상대방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야 합니다. 듣는 자세로 대화를 해야 합니다. 심지어 무신론자나 과학주의자들과도 대화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서문자주의나 교리주의로는 대화가 힘들겠죠. 열린 자세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바로 겸손입니다. 자신이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누구도 다 알지 못합니다. 내가 아는 것만 옳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끌어 주신다는 믿음이 중요하죠. 나를 하나님께 드리고 나를 열어놓고, 이웃을 품는 자세로 대화를 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정죄하는 자세로 대화를 하면 안 됩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자신의 신앙을 가슴에 품고, 상대방의 입장을 들으면서, 서로 소통을 하는 것이 대화의 방법입니다. 나의 신학을 과학과 대화하면서 폭넓게 지평을 넓히는 겁니다. 과학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도 신학적인 지평을 넓히는 것이죠. 
  
그런데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2차적인 단계가 있습니다. 이런 대화를 하고 나서 자신만의 새로운 신학을 구성해야 합니다. 여기에서는 어느 정도 규범적인 틀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단지 교회라는 신앙공동체 안에서 사용될 신학입니다. 교회 밖에서 사용할 용도가 아닙니다. 교회 밖에서 이걸 주장하면 대화가 안 됩니다. 설교 밖에 안 됩니다. 교회 안에서는 치열하게 새로운 신학을 위해 고민하고 연구해야 합니다. 



3. 그렇다면 어떤 내용으로 대화를 할 수 있을까요? 
  
지금 중요한 주제는 트랜스휴머니즘이나 인공지능에 관한 것입니다. 이제는 과학의 시대, 특별히 기술의 시대입니다. 생명과학과 유전자 편집, 인공지능의 발달은 지금 실험실에서 이뤄지고 있고, 현재 우리의 삶을 이끌고 있습니다. 당장 우리들도 핸드폰에 끌려가고 있잖아요. 과학은 우리의 삶 속에 깊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러니 창조와 진화 논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어쩌면 당장 급한 것은 인공지능이 우리 삶을 어떻게 바꾸고, 어떻게 위협하고 있는지를 봐야 합니다. 과학기술에 대한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문제를 따져봐야 합니다. 트랜스휴머니즘이 나타나면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은 어떻게 되는지 고민해 봐야죠. 그러니 우리는 현대의 과학자들과 공학자들과 대화를 해야 합니다. 
    
근대주의가 인간중심주의로 흘러가니깐 포스트휴머니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사실 트랜스휴머니즘은 조금 다른 이야기입니다. 호모 사피엔스 다음이 트랜스휴머니즘입니다. 예전에는 교회가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지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이제는 하나님 나라의 청지기로서 과학을 알아야 합니다. 한 손엔 성경, 한 손엔 신문이 아니라, 한 손엔 성경, 한 손엔 과학이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 과학자들을 훈련시키고, 실험실에서 지금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체크해야 합니다. 지금 벌써 사이버 교회가 나오고, 인공지능이 설교를 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우리도 준비를 해야죠. 
 


4. 새로운 과학의 발전과 도전 앞에서 기독교는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할까요? 

 
기독교는 항상 새로운 도전 앞에서 정화가 됐습니다. 이제 가짜 설교, 가짜 목사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영적인 교류를 통해 말씀을 전하고 선포하는 진짜 목사가 나와야 합니다. 진짜 목사, 진짜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죠. 인공지능은 신학적인 문제일 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에 대한 문제입니다. 
  
미래의 트랜스휴머니즘은 기독교에 하나의 도전을 줍니다. 너희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이 진짜냐? 기독교가 말하는 참 인간은 무엇이냐? 신론에도 도전을 줍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인공지능이 다 하는걸요. 그렇다면 기독교가 말하는 하나님은 무엇인가? 그래서 저는 십자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넘어서 자신의 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종말론에도 충격을 주죠. 그동안 기독교는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면서 눈물도 없고 슬픔도 없는 나라를 소망했는데, 이제 과학이 그것을 해 주겠다고 하잖아요. 그럼 기독교는 뭐가 다른 거죠? 그러니 신학이 할 일이 정말 많습니다. 기존의 틀로는 안 됩니다. 환골탈태해야 합니다. 
  
칼 바르트는 신문을 보고 기도를 한 신학자입니다. 어쩌면 나치에 저항할 수 있었던 힘이 기도에서 나온 겁니다. 이제는 최첨단의 과학 소식을 접하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들은 겸손하게 공부하고 기도하는 일입니다.
  
저는 이미 은퇴를 했습니다. 이제 후배들이 이어받아야죠. 새로운 주제들이 계속 쏟아지기 때문에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과신대는 열정이 있는 것 같아요. 앞으로 겸손한 마음으로 열심히 이 분야에 공헌을 해 주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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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조그만 틀이 부서질 때

박영식, 『창조의 신학』 (동연, 2018)


어진성 (인천대학교 화학과 학부생)



뇌과학자 정재승 씨가  열두 발자국이란 책이 있습니다.  책을 어느 유투버가 소개하면서 정재승 씨에 대해 이렇게 평가를 합니다. “과학이 재미있다고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을 통하여서 지혜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연과학 학부생이고, 신학에 대해 자세히 모르는 교회 청년으로서 <창조의 신학>에 대 평을 감히 내리자면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책은 신학자와 과학자의 잘잘못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삶을 돌아보고, 공동체의 삶을 돌아보고, 한국 교회의 삶을 돌아보라는 지혜가 담긴 편지입니다.


저는  책을 보고 '어느 이론이 현실에 더욱 적합하다, 누구의 이론이 맞다 틀리다'가 아니라 하나님을 알기 위해 노력하는 신앙의 선배들의 이야기와 지금의 우리에게 전하는 위로와 지혜가 숨겨져있다고 느꼈습니다주제에 따라 고대 철학과 종교적 이념에서부터 현대 신학자들의 다양한 이론까지 차근차근 설명해줍니다. 시대와 역사에 따라 대립되는 이론들의 다툼과 화해,  역사들을 통해 우리가 가져야 할 견문과 태도를 때로는 진득하게 때로는 물음표를 던져주며 대답을 강요하지 않고 우리에게 생각할  있도록 기다려줍니다. 책을 덮고, 잠시 눈을 감기도 하고, 높은 하늘을 올려다볼 여유를 선사합니다.
 


사실 저는 교회 청년부에서 창조과학에 대한 간단한 발표를 준비하면서 이 책을 접하게 되었습니다처음에는 만화로 된 <창조론 연대기> 그리고 나서 <아론의 송아지>, <과학시대의 도전과 기독교의 응답>과 같은 책들에 바탕으로 발표를 준비하던 차에 과신대 모임에서 <창조의 신학>을 접하게 되었습니다비슷한 내용들이 있을 거라 생각을 했고, 처음엔 어디   읽어보자는 거만한 마음으로 책을 접하게 되었죠. 그런데 책뿐만 아니라 교수님과의 모임을 통해서 챕터를 쓰게  배경들에 대해서도 듣고, 과학에 대해 고민하는 젊은 호기심들을 느끼며,  책이 점점  인간적으로 다가오더라고요.
 
기독 청년으로써 무신론자들을 대하는 교수님의 지식과 지식을 전달하는 자세가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교회를 다니면서 '이것이 무조건 맞다, 그것은 절대 아니다. 상대를 하지 말아라, 그냥 피해라'라는 극단적인 조언들을  또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처음엔 젊은 지구론도 그렇게 잠깐 받아들이기도 했었죠. 하지만 창조론에 대해  알아가며 치우치지 않으려 많이 노력했습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내에선 아직 그러한 변화에 대한 반응과 민감함이 크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을 통해 제가 배운 것은 2가지입니다. “똑똑할수록 겸손해진다.” “지나가던 나그네의 옷을 벗기게 한 것은 태양이었다.”라는 것을요. 여러 자기계발 SNS 페이지들에 올린 영상들을 접하면서 어중간한 지식이 가장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또한 그랬고요.  책은 나보다 똑똑한 사람의 겸손함을 적나라하게 시사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왜?'라는 질문을 통해서 우리가 놓친 부분들을 상기시키고, 대립되는 주장에 아킬레스건들을 정확히 건드리며 고민하게 만들죠. 대립이 아니라 대화였습니다.
 


<창조의 신학>은 대화를 담은 책입니다. 과거와의 대화, 현재와의 대화, 창조의 하나님과의 대화, 대립과의 대화다양한 매개체들과의 대화를 통해 제가 아는 하나님의 영역이 훨씬  넓어지게 되었고, 전지전능함을  느낄  있었고, 아버지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악이 무엇인지를 다룬 8장에서 교수님은 학자들의 다양한 관점들을 소개하고 함께 비추어보며 우리가 지금 고민해야 할 것들을 던져주십니다. 9장에서는 악을 이야기하면서도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보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들을 통해 나 자신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삶 속에 모신다고 고백하면서도 정작 하나님이 찾아오셨을 때는 그분을 몰라뵈고 있지는 않는지 되돌아봤습니다. 하나님을 선포할 때조차도 하나님을 시간에 가두고,  옛날 과거의 사건에 가두었던 지난날이 부끄럽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나고 배워나갈수록 신학이란 학문에 엄청난 힘이 있음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문득 친구 사역자들이 ‘신학을 배우는 것이 좋다‘라고 얘기하는  보곤 했는데,  책을 통해 다시   하나님을 바라보는  식견이 평신도로서 얼마나 좁았는지를 느낄  있었습니다. 치열한 고민과 생각 속에서 만들어진 신학을 읽으며,  스스로 신학을 학문적으로 낮게 봤던 것이 부끄럽습니다.

 
성경의 처음 이야기하는 창조는 단지 구약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삶 속에서 창조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해 줍니다.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신앙은 삶의 가능성에 대한 희망을 제시하며, 평화를 약속한다.”
 
이 책을 통해 하나님을 가둬두고 믿었던 나의 조그만 틀이 부서졌습니다.  마음 깊은  잔해들과 함께  책은 에필로그를 마칩니다일과 휴식의 조화를 이루며, 끊임없이 창조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인정합니다. 기억하고, 가슴에 새길 것입니다. 이전 것을 버리고, 창조의 하나님과 함께 새로운 프롤로그를 써 내려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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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칼럼


스킨십, 소통, 그리스도



김영웅 박사[각주:1] 



사랑하는 아내와 키스를 하고 잠자리에서 빠져나와 아들의 방으로 향한다. 아직도 곤히 잠들어 있는, 천사 같은 아들을 꼬옥 안아주며 볼에 뽀뽀를 한다. 사랑한다고 말을 한다. 나의 하루가 시작된다. 스킨십을 하며 사랑을 표현하는 것만큼 우리가 몸을 가진 존재임을 감사하게 되는 순간이 또 있을까. 사랑할 수 있고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 그렇다. 우린 인간이다. 몸을 가진 인간이다.


인간은 유한한 육신에 갇혀 있기 때문에, 우린 자칫 인간의 육신을 생각할 때면 제한받고 통제받는다는, 부정적인 의미만을 강조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난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유한한 인간을 창조하신 이유를 제한과 통제보다는 오히려 자유함에서 찾는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질 수 있고, 그 만짐으로 인해 사랑을 느끼고 비로소 안정감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우리 육체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며, 이는 곧 자유함이기 때문이다. 창조된 우리의 육체는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어쩌면 천사가 흠모하는 인간의 본질은, 그들은 가지지 못했으나 인간만이 가질 수 있었던, 바로 우리 육체에 있을지도 모른다.


생물학자로서 나는 생명체를 연구하며 그 신비함에 깊이 경탄할 때가 많다. 특히, 도저히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정교하고도 완벽하게 디자인된 생명체의 신비를 하나님의 창조라고 믿는 내가 이런 순간을 마주할 때면, 창조자 앞에서 전적으로 겸허해질 수밖에 없다. 우리 생물학자들은 문명이 급속도로 발달한 21세기에도 여전히 감추어져 있는 생명의 비밀을 찾아내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그리고 마침내 드러난 비밀 앞에서 그 누구보다도 먼저 감탄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진다. 그러면서 어떻게 그러한 신비가 가능한지 그 메커니즘을 밝혀내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과학자로서 일상의 시간은 하나님의 창조물을 연구하는 것이기에, 아무리 새로운 비밀을 많이 밝히고 안다 하더라도 전혀 지루하지가 않다. 오히려 더 알고 싶고 또 알고 싶을 뿐이다. 무한한 생명의 비밀 앞에서 과학자는 하나의 점에 불과하다. 이는 마치 칼 세이건의 제안에 따라 보이저 1호가 카메라를 돌려 지구를 포착한, 희미한 푸른 점(Pale Blue Dot)과도 같은 의미일 것이다.


폴 브랜드 & 필립 얀시,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손길』(생명의말씀사, 2016)


폴 브랜드를 책으로 처음 만났다. 그는 뛰어난 실력을 갖춘 정형외과 의사였을 뿐 아니라, 선교사적인 사명을 자신의 소명이라 여기고 한 평생을 보낸 평신도 선교사였다. 그런데 그의 선교지는 어떤 특정한 지역이기보다는 한센병과 한센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었다.


문둥병이라고도 불리는 한센병은 자멸하는 병이다. 사지가 서서히 절단되고 코가 문드러지는 육신의 처참함을 동반하는 병이다. 그러나 한센병 환자들에게는 그 이상의 고통이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그 고통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이다. 한센병은 주로 신경 세포를 공격하여 감각을 차단시켜 버린다. 이것은 어느 날 손가락 하나가 잘려도, 그들의 비극은 손가락 하나를 잃었다는 사실이기보다는 그 아픔을 전혀 못 느낀다는 데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폴 브랜드는 어느 날 그의 한센병 연구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게 된다. '한센병의 무서운 결과는 환자들이 고통 감각을 상실했기 때문이 아닐까?' 그 이후 그는 한센병이 조직의 부패 없이도, 통증의 감각을 상실시킨다는 사실을 최초로 발견하게 된다. 그는 외과의사로서 한센병 환자들의 외과적 수술과 재활에 현격한 관심을 기울인 결과로 그 분야에 있어 세계적인 권위자가 되었다. 또한 그는 한센병 환자들을 위한 재활 공동체를 운영하며 평생을 한센병 환자들과 함께 하는 사랑을 실천한 우리들의 위대한 스승이기도 하다.


이 책은 어느 날 필립 얀시가 아내의 벽장에 아무렇게나 뒹굴던 한 편의 에세이를 읽고 난 후, 어떤 강한 힘에 이끌려 그 에세이의 저자였던 폴 브랜드를 직접 찾아가 만나게 되면서 비로소 탄생할 수 있었다. 이제는 어느덧 기독교 작가로서 탄탄한 자리매김을 하고 있는 필립 얀시이지만, 폴 브랜드를 만날 때만 해도 그는 이십 대의 젊은 저널리스트였다. 폴 브랜드와의 만남은 필립 얀시의 인생에 있어서 커다란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폴 브랜드가 죽고 나서 그는 회고한다. 폴 브랜드를 통해서 이론으로만 들었던 기독교적 삶이 현실이 되어 나타날 수 있다는 확신뿐 아니라, 겸손함을 잃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을 희생적으로 섬기면서도 얼마든지 기쁨과 만족을 얻을 수 있다는 확신까지도 얻을 수 있었다고 말이다. 그는 그런 확신이 미약해질 때면 항상 폴 브랜드와 함께 했던 시간을 떠올린다고도 고백한다. 폴 브랜드는 필립 얀시에게 있어서 실로 거인이었던 것이다.



우리의 몸을 이루는 가장 작은 단위인 '세포'에서 출발하여 (1부), 이 책은, 골격을 유지해 주는 힘이 되는 '뼈' (2부), 다른 생명과 소통하는 통로가 되어주는 '피부' (3부),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모여 우리들의 몸을 움직이는 신비한 메커니즘인 '동작'에 이르기까지 (4부),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리들의 몸을 비유로 하여 실로 우주적인 그리스도의 몸과 교회 공동체에 대한 메시지를 담담히 선포한다. 바울 역시 교회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면서 인간의 몸과 각 기관을 비유했음은 우리가 모두 잘 아는 바다. 우리 각자는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하나의 지체인 것이다. 폴 브랜드는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우리는 하나의 세포라고 한다.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세포, 우리들 각자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이루는 가장 작은 단위라는 것이다.


세포가 가장 세포다울 때는 하나의 세포가 주위의 세포와 유기적인 공동체를 이루며, 자신이 몸의 일부라는 사실을 잘 알고 충성하여 전체 몸이 정상적인 동작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줄 때다(이것이 책의 목차가 1부 ‘세포’에서 시작하여 4부 ‘동작’으로 마치는 의미이다). 세포다움은 세포의 dependence에 있기보단 inter-dependence에 있는 것이다. 작은 하나의 완벽함보다는 연약한 하나일지라도 조화롭게 모여 큰 하나를 이루는 것에 바로 세포의 존재 이유와 정체성의 본질이 있다.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세포에 비유한다면, 마찬가지 논리가 적용된다. 우리들이 자본주의적이고 성공지향적이며 물질지향적인 가치관에 묶인 채 개인의 번영과 안녕에만, 그리고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유익만을 추구한다면, 그 세포들이 모여 이루는 그리스도의 몸이 어떻게 될는지는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세포 중에서도 어떤 세포는 자신의 생명에만 연연하여 주위의 세포들과 전혀 소통하지도 않고, 자신이 전체 몸의 일부인 것을 망각한 채 몸에 충성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독립적으로 사는 쪽을 선택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세포를 우린 암세포라고 부른다. 암세포는 자기중심의 원죄를 짊어진 인간의 이기적인 본질과도 너무나 닮았다.



필립 얀시를 통하여 폴 브랜드는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각자 그리스도의 우주적인 몸을 이루는 하나의 세포이지만, 똑같은 기능을 가진 클론이 아니라 서로 다른 기능을 가진 세포로 분화되어 있으면서도, 그래서 다양성을 가질 수밖에 없으면서도, 그러므로 서로 연합하고 봉사하고 헌신하여 건강한 공동체 (교회)를 이루는 임무를 맡았다고 말이다. 그러나 현실을 둘러보면, 교회만큼 상이한 사람들이 모인 기관도 없다. 사회에서 통용되던 가치체계나 기준으로는 그 무엇으로도 하나의 집합으로 모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단 한 가지, 오직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머리로 삼고 있는 존재라는 이유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것도 공통점이 없다. 하지만 바로 여기에 우리들의 연합함의 비밀이 있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우리가 연합할 수 있는 근거는 우리의 유사점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다양성에서부터 시작된다.


연합의 근거와 시작이 되어주는 다양성은 또한 우리들이 새로운 장소에서 낯선 만남을 가질 때에도 하나님 나라가 임한 사람이라면, 함께 한 몸을 이루는 세포요, 서로 공동체를 이뤄야 하는 존재임을 간파하며 결속력을 느낄 수 있게 해 주는 이유가 된다. 처음 보는 사람도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세포이기에 금세 한 가족이 될 수 있다. 서로가 다른 기관을 이루는 세포이지만, 그래서 피부색이 다르고 형편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지만, 한 몸을 이루는 일부인 것처럼, 전 세계에 흩어진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자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일부다. 우리는 형제, 자매요, 가족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교회에게 남겨진 사명이요, 인간으로서 가장 인간다운 만족함을 얻을 수 있는 공동체의 환희다. 그리고 그것은 곧 사랑이다.



책을 덮고 글을 쓰니 어두워졌다. 나는 곧 잠자리에 들어가 잠을 청할 테고 아침에 눈을 뜨면 또다시 사랑스러운 아내의 키스와 사랑하는 아들의 포옹으로 내일을 시작할 테다. 그러나 어제와 오늘은 다르다. 건강한 세포가 우리 몸을 이루고 있으며, 골격을 유지해 주는 튼튼한 뼈와 다른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통로가 되어주는 피부가 내게 있음은, 그저 나 자신의 건강이나 내가 속한 가족 안에서의 소통만을 위한 것이 더 이상 아님을 느낀다. 우리는 우리가 속해져 있는 그리스도의 몸을 생각해야 한다.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향해야만 하고 충성해야만 하며, 나와 가족을 넘어선 모든 하나님 백성들과의 연합을 생각해야 한다고 나의 온몸이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더 큰 하나의 몸을 생각해야 한다. 좀 더 머리로부터 오는 시그널에 민감해져야 하고, 그 시그널에 우선순위를 두고 삶의 패턴과 궤도를 수정해야 한다. 지경이 더 넓혀질 시간표다.



  1. 분자생물학과 마우스 유전학을 기반으로 혈액암을 연구하는 과학자다. 미국 City of Hope에서 Staff Scientist로 일하고, 과신대 파사데나 북클럽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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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북클럽 이야기 | 서울 남부 북클럽]




진화는 왜 사실인가

제리 코인, <지울 수 없는 흔적> (을유문화사, 2011)


우종학 (과신대 대표)


* 이 글은 우종학 교수님 페이스북 담벼락에서 가져왔습니다. 


세 분이 새로 오셔서 활기가 더해졌습니다. 북클럽 카톡방에는 30명이 넘는 분들이 있는데 거쳐가신 분들도 있고 꾸준히 나오는 분들도 있습니다. 오늘 끝날 때 한 분이 이야기하길, 3년 넘게 책을 읽고 공부하면서 점점 겸손하게 된다고 합니다.


제리 코인의 [지울 수 없는 흔적]의 전반부 1-4장을 읽고 나누었습니다. 다들 과학책이 너무 재미있답니다. 쉽게 논리적으로 쓴 저자의 글솜씨도 있겠지만 진화에 관한 내용들을 따라 읽는 과정이 사실 흥미롭습니다.



1장은 진화란 무엇인가를 다룹니다. 6개의 키워드가 나옵니다. 1) 진화 2) 점진주의 3) 종의 분화 4) 공통조상 5) 자연선택 6) 자연선택이 아닌 다른 진화의 기작. 이 개념들을 각각 설명하는 책의 도입부입니다.


진화는 유전자 변이를 통해 긴 시간 동안 종이 변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그것이 매우 길게 점진적으로 쌓이면 공통조상에서 종이 분화합니다. 그렇게 분화시키는 힘이 자연선택을 비롯한 몇 가지 메커니즘입니다.


2,3,4장은 진화의 증거를 다룹니다. 화석의 증거, 흔적기관과 배아, 그리고 생물지리학의 내용이 각각 흥미롭게 펼쳐집니다. 다윈이 종의 기원을 쓰던 시절에는 화석의 기록이 변변치 않았고 주로 생물지리학에서 영감을 받았지만 한 세기 반이 지난 지금 화석의 증거는 매우 강력합니다.


우리들이 중고 시절에 생물학을 배웠을 때와도 다르게 전이 화석들도 많이 발견되었습니다. 특히 어류와 양서류의 출현시기 사이에 해당하는 지층을 뒤져서 찾은 전이 화석은 유명한 일화입니다. 시간에 따라 종의 변화를 보여주는 화석의 기록을 보면 바로 지울 수 없는 흔적이라는 책 제목이 연상됩니다.


흔적기관들과 배아도 강력한 증거입니다. 인간도 뱃속에서 열 달을 지내는 동안 어류, 양서류, 파충류의 배아의 모습을 거쳐갑니다. 참 신기한 일입니다. 진화는 새로운 것을 뚝딱 만들어내는 일이 아니라 옛것을 고쳐서 새롭게 만드는 일이니 우리 몸의 DNA는 옛 조상의 정보들을 상당히 많이 갖고 있습니다.


그래도 어떻게 인간의 배아의 모습이 그동안 거쳐간 진화 과정을 거치며 변하는지 신기할 따름입니다. 왜 그런지 밝혀지지 않았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진화의 과정을 통해서 창조했음을 알려주기 위해서 신이 일부러 보여주는 계시일지도 모릅니다. ^^



생물지리학은 참으로 강력한 증거입니다. 하와이나 갈라파고스 같은 대양 섬들에는 대륙에 사는 포유류, 양서류, 파충류들이 거의 없습니다. 반대로 대양 섬에 존재하는 동식물은 주로 가까운 대륙 연안에 분포하는 동식물과 비슷합니다. 이것은 대양 섬에서 격리된 채로 진화가 일어났음을 잘 보여줍니다. 다윈이 영감을 얻은 것도 바로 이 점이었지요.


화석의 증거, 흔적기관, 생물지리학 이렇게 3가지로 증거를 제시하지만 아쉬운 점은 유전자 정보를 다루지 않았다는 겁니다. 종과 종의 유사성과 분화 과정을 정량적으로 추적할 수 있는 강력한 도구인 유전자 유사성의 증거가 책에는 별로 다뤄지지 않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은 2009년에 출판되었고 그때는 겨우 인간 게놈의 지도가 완성되던 시절입니다. 물론 지금은 맞춤형으로 한 개인의 유전지도를 분석해서 얻을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비용이 백만 원이고 미국에서는 몇십 불짜리 키트도 있다죠. 10년 동안 게놈 분석이 엄청나게 발전했다는 말입니다. 동물들도 유전자 분석을 통해 진화 과정을 추적할 수 있게 되었죠. 하지만 10년 전에는 그런 정보가 별로 없었을 테니 이 책에는 그 내용이 별로 없습니다. 아쉬운 점입니다.


전반부를 읽고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저자는 창조론이 틀렸다며 계속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물론 저자가 말하는 창조론은 즉각적 창조론입니다. 생물들을 따로따로 설계해서 즉각적으로 만들었다는 창조과학과 지적설계의 입장을 깝니다.



왜 많은 교인들이 즉각적 창조와 진화적 창조 중에서 즉각적 창조를 선호할까라는 질문에 몇 가지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1. 우선 성경이 즉각적 창조를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입니다. 물론 성경해석의 문제입니다. 성경은 진화적 창조를 배제하거나 즉각적 창조만이 옳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지는 않습니다.


2. 성경은 오히려 즉각적으로 일하시기 보다 긴 과정을 거쳐 사람들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애굽으로 내려간 야곱의 가족을 200만 명으로 즉각적으로 만들 수도 있지만 하나님은 인간들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역사를 만들어내도록 400년을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은 인간과 협력하여 역사를 섭리하십니다.


3.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다양한 생물종들을 즉각적으로 만드는 대신에 긴 과정을 거쳐서 필연과 우연을 거치면서 유전자 변이와 종의 분화가 일어나도록 자연에 자율성을 줍니다. 하나님은 자연과 협력하여 창조 과정을 섭리합니다.


4. 하지만 우리 인간은 즉각적인 하나님을 좋아합니다. 수능시험을 앞두고 시험을 잘 보게 해주시는 그런 하나님을 원합니다. 내 욕망과 욕심을 채워주시는 그런 기적적인 하나님을 선호합니다.


5. 그러니 즉각적 창조를 진화적 창조보다 더 선호합니다.



6. 물론 이는 우리가 바라는 하나님의 모습이며 우리가 만들어 낸 하나님의 모습일 뿐입니다. 성경에서 제시하는 하나님은 그렇게 알라딘 램프의 지니처럼 우리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즉각적으로 일하지 않습니다.


7. 더군다나 진화적 창조는 왠지 인간의 위상을 떨어트리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인간을 창조해야 인간이 특별해질 듯합니다. 참 이상한 심리이지요. 인류가 기적적으로 창조되었더라도 나는 기적적으로 창조된 것이 아닌 게 분명한데 말입니다. 아담은 모르겠지만 나는 정자와 난자의 수정을 통해 세포분열 과정을 통해 창조되었으니까요. 내가 그런 방법으로 창조되었다고 해서 존엄하지 못한 존재가 되는 건 아닙니다. 아담도 마찬가지입니다.


8. 즉각적 창조는 하나님이 뭔가 일하시는 것 같지만 진화적 창조는 약간 이신론 같다는 거부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무것도 안 하고 자연이 스스로 진화를 시켜낸다는 그런 오해 말입니다.


9. 하지만 근대과학 이후에 이런 이신론적 느낌은 계속 있어왔습니다. 물리학에서는 뉴턴이 중력으로 천체들의 운동을 설명했고 마치 하나님 없이 별과 행성들이 운동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물리학은 다 받아들입니다. 물리학은 이미 포기했으니 생물학이라도 붙들자는 말일까요?


10. 사실 진화가 일어나는 과정, 그 우연의 과정을 통해 우리 인간이 출현했다는 것은 믿기지 않을 만큼놀라운 일입니다. 유전자 변이가 무작위적으로 일어나고 진화가 방향성 없이 흘러온 것 같지만 그 모든 과정은 신의 역사요 섭리요 계획이었던 것입니다.


11. 즉각적 창조가 맞나 진화적 창조가 맞나 하는 문제는 물론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진화적 창조를 받아들이면 많은 것이 변합니다.


11.1 우선 하나님에 대한 시각이 바뀝니다. 천지를 뚝딱 창조한 분이 아니라 오래 참음과 자기를 비움으로 그리고 자연에 자율성을 부여하여 공들여 창조한 분입니다. 마치 10달 동안 뱃속에서 자라는 아기를 태교하며 마침내 출산을 통해 아기를 낳는 어머니처럼 하나님은 천지를 그렇게 보듬어 창조하셨습니다.


11.2 인간에 대한 시각도 바뀝니다. 인간은 생물학적으로는 그리 특별한 존재가 아니지만 그런 인간을 하나님은 특별한 존재로 삼으셨고 하나님과 같은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촘촘하게 미리 짜두신 계획을 어떻게든 알아내어야 하는, 마치 미로찾기 임무가 주어진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신 자유의지를 가지고 마음껏 창조하고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는 존재입니다.


11.3 자연에 대한 시각도 바뀝니다. 인간은 만물을 파괴할 권리를 가진 폭군이 아니라 창조계의 한 구성원으로 함께 지음 받은 가족입니다. 창조세계를 보존하고 지킬 의무를 갖고 있습니다.


11.4 성경에 대한 시각도 바뀝니다. 문자적으로 성경을 읽고 성경의 표현 안에 하나님을 가두어 두기보다는 나의 성경해석이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하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을 물어가게 됩니다. 도그마적인 태도를 버리고 인간의 언어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크심과 놀라우심을 묵상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과학도 공부하고 성경도 공부하고 신학도 공부해야 합니다. 그래서 과신대 북클럽에도 참석해야 합니다.^^ 한국교회의 문제는 성숙하지 못하다는 점입니다. 한국교회가 성숙하려면 바로 내가 성숙해져야 합니다.



12월 모임 안내

* 모임 일시: 12월 11일(화) 저녁 7시
* 모임 장소: 더처치 비전센터 6층 세미나실 (서울 관악구 쑥고개로 122)
* 읽어 올 내용: 제리 코인, <지울 수 없는 흔적>, 5~9장
* 문의: 070-4320-2123, scitheo.offic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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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탁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 3학년)



전도사님 빅뱅은요? 

선생님 인간은 원숭이에서 시작한 거 아니에요?


교회학교를 담당하는 사역자, 교사 중에 이런 질문 한 번 받아보지 못한 사람이 누가 있을까. 부모님 손을 잡고 교회에 온 아이들은 일주일에 한 번 오는 교회보다는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학교 교육에 더 익숙한 것 같다. 창세기보다는 과학 교과서에 더 마음이 가는 것 같다. 이것은 별로 놀라울 일은 아니다.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하늘에서 비행기가 날아다녔고, ‘우주와 다름없는 스마트폰(물론 사과도 있겠지만)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세상에 태어났다. 아이들이 태어난 세상은 고대인들이 꿈도 꾸지 못했을 세상이다. 그리고 이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현대의 과학과 기술이 이뤄낸 세상이다.


부모님의 손을 잡고 매주 교회에 와서 어른 예배가 끝날 때까지 교회학교에 와있는 아이들에게 창세기와 그리스 로마 신화는 어떻게 다를까. 대부분의 아이들은 어른들과 달리 외로움에 사무치는 밤을 모를 것이다. 억장이 무너지는 고통 속에서 의지하는 십자가의 사랑을 모르는 것이 정상이다. 그렇다면 어린이들에게 하나님의 창조는 어떤 의미일까. 풍요의 시대, 아이들에게 식사 감사 기도는 어떤 의미일까.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것은 아닐까. 목사가 되신 선배님들은 매주 교회에서 어른들을 마주하겠지만 나와 연배가 비슷한 나의 동료들은 주로 아이들을 마주한다. 


똑똑하고 세련된 아이들 사이에서, 우리의 하나님은 창조의 하나님이다!’라는 선포는 종종 한 청년의 고백이 되어버릴 때가 있다. 그래도 아이들은 즉시 반박하거나 도전하지는 않는다. 나는 당신의 말에 동의하지 않고 있다는 표정을 하고 있을지라도, 예의 바른 아이들은 잘 참고 들어준다. 그리고 어른 예배가 끝나면, 부모님의 손을 잡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에 간다.


  
신학과 학생회와 과신대가 공동으로 주최한 세미나 <창조, 어떻게? ? 무엇?>은 나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동료들의 관심과 열정을 느낄 수 있는 자리였다. 과신대 자문위원이자 본교 신학과 소속 조성호 교수님의 인사말로 시작된 세미나는 박영식 교수님과 우종학 교수님의 강의로 구성된 1부와 질문과 대담으로 이루어진 2부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신학자가 말하는 창조는 무엇을’, 그리고 에 대한 대답과 함께 오늘도 계속되는 창조에 대한 강조가 돋보였다. 그리고 과학자가 말하는 창조는 어떻게에 대한 대답으로써 과학이 우주의 형성 과정에 대해 밝혀낸 것을 빠르게 살펴보는 시간이었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과학과 신학이라는 두 언어(Lingual)’의 강연과 대화를 실제로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두 언어의 대화를 강조하는 이론과 책은 무수히 많지만, 실제로 대화하는 것은 또 다른 어려움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건 나중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대립하는 두 언어의 모습을 기대하고 그 자리에 온 친구들도 있었다. 


사실 우리가 자주 접하는 두 언어의 모습은 대화보다는 대립이다. 그러나 그날은 그렇지 않았고, 그것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것을 본 것 자체가 매우 자극이 되었다. 각자 다른 언어를 구사하는 서로를 존중하고, 서로의 강연을 경청하는 모습. 서로의 독립을 인정하면서 학문적인 월권(越權)을 각별히 조심하려는 두 강연자의 모습은 과신대 그 자체였고, 신학을 공부하는 후학으로서 앞으로의 공부에 귀감이 될 것 같다. 



또 한 가지 감동적이었던 것은, 우종학 교수님의 강의 슬라이드가 넘어가는 화면 옆에 걸려 있는 십자가를 보는 것이었다. 오늘날 신앙인들은 리처드 도킨스 같은 과학자들을 원망하지만 과학(혹은 과학주의)이 신학을 못살게 구는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교회는 현대 무신론자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오랫동안 과학을 통제하고, 감금하고, 재판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갈릴레오가 있을 것이다. 눈이 멀 때까지 우주를 관측하던 천재 과학자가 10년 동안 자택에 감금된 채 여생을 보내야 했던 이유는 교회 권위에 도전하는 지동설을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기독교인들의 믿음이 과학의 상식과 연결되지 않는다면 ‘천동의 광기는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거대 종교의 이름으로 과학에게 무력을 행사한 교회가 선포한 ‘천동은 과거의 일이 아닐 수도 있다. 따라서 눈으로는 십자가 보고, 귀로는 빅뱅이론 강의를 듣는 이 날의 경험은 나에게 대단히 큰 감동이었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천동을 넘어설 수 있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날 밤 십자가는 포용과 사랑의 증거로 우리와 함께했다고 믿는다. 


창세기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말한다. 히브리 사람들은 하나님의 창조 기사를 영감으로 감동되어 기록하였을 것이고, 우리는 그 말씀을 읽고 믿는다. 그러나 성경 말씀을 믿는 것과는 그 믿음을 오늘의 언어로 표현하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다. 하나님의 창조와 영광을 표현하기 위해선 언어가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과학과 신학은 오늘도 일하시는 하나님(요 5:17)이시며, 계속되는 창조(creatio continua)로 세상을 이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롭게 주신 두 언어가 아닐까. 성경의 말씀이 우리들이 사용하는 언어와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다. 서로 언어가 맞지 아니한 이런 까닭으로 창조에 대해서 말하고자 할 바가 있어도 그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은 것이다. 창조의 하나님이 이것을 가엽게 여겨 새로 과학과 신학이라는 언어를 만들어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성경 말씀을 사랑하고 그것을 표현하고자 하는 우리들이 할 일은 분명해 보인다. 두 언어를 부지런히 익혀 날로 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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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북클럽 이야기 | 수원 북클럽]



상쾌한 아침 공기와 함께 드디어 오늘 수원남부 북클럽이 시작되었습니다. ^^
환영 안내지를 미리 준비해 주신 성공회 제자교회 김진세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감동했습니다. 별 것 아닌데 왜 이리 고마운지.... ㅎ~


첫 모임이니 만큼 각자 소개 시간을 가졌습니다. 인격적으로 존경할 만한 목사님이 있는 곳에 다녔으나 세월호 사고를 대하는 교회의 태도에 실망한 나머지 가나안 신자가 된 분도 오셨습니다. 왜 아니겠습니까? 2017년 4월 16일은 게다가 부활주일이었는데 그 아픔에 전혀 공감하지 않는 예배 내용에 실망했던 저의 기억도 소환되었습니다.



무크따(무신론 기자, 크리스천 과학자에게 따지다) 1~4장을 통해 과학과 신앙의 관계에 대해서 다루었습니다. 과학과 신앙에 대해 갖고 있던 오해들을 하나 하나 해체하고 정리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기적을 일으키는 하나님. 그런 하나님에 의존하는 신앙은 과학주의에 기반한 무신론의 공격에 취약합니다. 신앙인 스스로 하나님의 영역(전염병, 낙뢰, 태풍 같은)을 축소하여 버린 결과죠.


아이가 파란 하늘을 가리키며 저 하늘에 천사가 있고 하나님도 계시냐고 묻는다면 오늘의 정상적인 기독교인 신자라면 누구도 하나님이 저 구름 너머 혹은 안드로메다 은하 너머 어딘가에 있다고 답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비행기가 날고 구름이 떠 있는 '하늘'과 신앙의 '하늘'을 구별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으로서 가장 어려워하는 진화에 대해서도 우리는 '진화, 진화론, 진화주의' 이 3가지를 구분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침 우리 모임에는 진화학 석사와 면역학 박사 학위를 갖고 있는 루터교 오세조 목사님(팔복 루터교회)이 함께 하십니다. 진화는 지금도 관찰되는 자연 현상이며 이것을 연구하는 학문이 진화론, 생명과학이겠고 이런 과학이론에 기반해 무신론적 해석을 하는 태도를 진화주의라 하겠습니다.



과학과 신앙의 관계를 통합론의 관점으로 보는 창조과학과 무신론자들이 상정한 신은 '틈새의 신'에 지나지 않고 이 신을 놓고 벌이는 줄다리기는 아무리 봐도 과학으로 무장한 무신론자의 승리로 결론이 날 것 같습니다. 유사과학으로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요?


비록 실재의 한 파편에 불과할지라도 하나님을 엉뚱하게 이해하고 이웃에게 그릇 행하는 과오는 피하고 싶습니다. 과신대 북클럽이 그런 면에서 분명히 도움이 될 것입니다. 늦지 않게 수원 남부 북클럽에 합류하실 것을 권해 드립니다. 누구든 오실 수 있습니다.



* 모임 장소: 성공회 제자 교회(http://agnes.or.kr경기도 오산시 세남로14번길 25, 대한성공회 오산 세마대 제자교회
* 다음 북클럽 일정: 2018년 12월 15일(토)
* 문의: 070-4320-2123, scitheo.offic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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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한 해 동안 저희 과신대를

후원해 주시고 사랑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과신대 한 해의 사역을 마감하고

정회원분과의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회원의 밤을 준비했습니다. 


오셔서 편하게 식사하고 교재할 수 있는 

자리를 준비했으니 꼭 참석해 주세요. 




일시: 2018년 12월 8일(토) 오후 6:30

장소: NPOpia (서울시 종로3가 낙원상가 5층)

회비: 1만원 (학생 무료)

입금계좌: 카카오뱅크 3333-06-4458510 김고운

 

[참석 신청 바로가기]


* 원활한 행사 진행을 위해 11/28(수)까지 답변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문의: 070-4320-2123, scitheo.offic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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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북클럽 이야기 | 분당/판교 북클럽]




김근주, 『나를 넘어서는 성경 읽기』(성서유니온, 2017)


조중식



후기의 문을 열기 전에 먼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새로 합류하신 최윤희 선생님의 인사 말씀을 제대로 듣지 못하고 황급히 자리를 뜨게 되어 무척 죄송했습니다. 변명 같지만 이래서 환영 인사 및 자기소개는 모임 초반에 하는 것이 정석입니다. 장장 11페이지에 걸쳐 발제문을 써 오신 정훈재 선생님의 노고에 합당한 대우를 해 드리기 위해 멤버들 마음이 다들 급했나 봅니다. 앞으로는 발제문 분량을 최대 5페이지로 제한하고, 이를 초과할 시 모임에서 강퇴시키는 규정을 만듭시다(썰렁했다면 죄송합니다).


“성경을 읽을 때 주의하지 않으면, 진
리를 전달하는 매개를 진리 자체와 혼동해 버리기 쉽고
그때 마다 교회는 세상의 빛은 커녕
세상의 화근으로 전락하곤 했다.”


성경 좀 읽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자신의 읽기 방식(그런 것을 나름 정리해서 ‘내 읽기 방식은 이런 것이다’라고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에 대해 별다른 문제의식이 없는 것 같습니다. 물론 저는 이 부류에 속하지 않습니다. 우선 성경을 많이 안 읽었고(꾸준히 읽으려고 시도를 안 해 본 것은 아닙니다만), 여전히 성경에 대해 아는 것 보다 모르는 것이 많기 때문이죠. 그런데 김근주 교수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한국 교회는 오히려 성경을 지나치게 많이, 그리고 무비판적으로 암기 하듯 머릿속에 집어넣는 일에만 매달리고 있어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성경이 무슨 책이냐고 물으면 열에 아홉은 간단히 ‘하느님의 말씀’ 이라고 답할 테지만, 정작 하느님께서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느냐고 재차 묻는다면 어떤 대답을 듣게 될까요?


솔직히 저도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대답이랍시고 불필요한 말들을 지루하게 늘어놓았을 테지요. 하지만 이제는 다음과 같이 간명하게 말 할 수 있어 기분이 매우 상쾌합니다.


“성경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려주는 책이다.”


책 제대로 안 읽고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을 구원해 주는 불법 복제 수준의 발제문은 ‘하느님을 아는 것이 성경읽기의 목적이다’,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인 동시에 사람의 글이다’, ‘비판적으로 읽기’에 이르기까지 거침없는 써머리를 제공하며 질주하다가, ‘성경 본문을 신학적으로 읽는다는 것의 의미’를 캐며 잠시 거친 숨을 골랐습니다. ‘공동체적 읽기’란 무엇인가?


제 기억에 최윤희 선생님께서 대강 “당신들 교회에서는 공동체적 성경읽기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셨던 것 같습니다. 이 대목에서의 ‘공동체적 읽기’는 분명 자신이 속한 교회 공동체 내에서의 성경 공부를 지칭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정도 범위의 ‘공동체적 읽기’가 ‘개인적 읽기’에 잠재된 위험으로부터 신자들을 보호하는 기능을 하기 어려울 때도 있으며, 이는 결국 ‘공동체의 범위’를 어디까지로 확장하느냐의 문제를 제기한다는 발언이 이어졌습니다(누가 했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많은 분들께서 이 주제에 대해 많은 유익한 말씀을 주셨습니다(자세한 기억은 없습니다). 저도 김란희 선생님처럼 속기사 수준의 현장 메모를 했다면 꼼꼼하게 다 적었을 텐데 말입니다. 아쉽네요.




여하튼 다시 박차를 가하기 시작한 발제문은 ‘역사에 나타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보는 대목에 이르러 온누리교회 문창극 장로를 소환합니다. “일제 강점기는 바빌론 유수가 그랬던 것처럼 ‘하느님의 뜻’이었나?” 이 물음 안에는 꽤 많은 지뢰, 부비트랩, 함정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대충 정리하고 논의의 초점을 모으는데 제법 긴 시간을 썼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문장로님 욕보셨습니다.


이어 신통방통한 발제문은 ‘성경 본문의 역사 : 본문의 배열과 편집이 본문 이해에 주는 의미’를 더듬고, ‘구약과 신약의 관계’를 2회로 나누어 집중 고찰한 후, ‘밭에 감추인 보화’를 찾기 위해 막판 스퍼트를 했는데, 이때부터 집에서 오는 긴급 호출 전화에 신경이 쓰여 솔직히 발제문 보다 시계를 더 많이 보았습니다. 후기 마무리가 김빠진 사이다처럼 된 건 순전히 제 불찰입니다.


심현준 선생님. 볼펜 주셔서 감사합니다. 왜 주실까 잠시 궁금했지만 귀찮아서 묻지 않았습니다. 석기병 선생님. 마지막까지 궁금하신 것이 많으신 듯 보였는데, 제가 본의 아니게 흐름을 끊은 것 아닌가 싶어 죄송한 마음이었습니다. 짜증 안 나셨죠? 이미선 선생님. 지난번 모임 때 교회에 아이를 데려와 놀려도 되냐고 물으시더니 이번에도 혼자 오셨네요. 박철성 선생님. “사진 잘 봤습니다. 분위기도 훈훈해보이고...” 라니요? 어제 오신 분은 쌍둥이 형제분이신가요? 김자현 선생님. 저는 비록 일찍 자리를 떠 듣지 못했지만, 모임 말미에 깊이 있는 한 말씀 저희에게 들려주시고 가셨으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강사무엘님. 끝까지 뒷정리를 함께 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하여간 일복은 진짜 타고나신 분입니다. 마지막으로 프란시스님... 땡큐.



12월부터는 김근주 교수님의 『복음의 공공성』으로 3개월 간 모임을 진행합니다. 


<분당/판교 북클럽 12월 모임 안내>
일시 : 12월 11일(화) 저녁 7:30
장소 : 성공회 분당교회
책 : 복음의 공공성(김근주)
북클럽지기 : 강사은(overfrost@naver.com)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과신대와 함께 하는 분들을 인터뷰를 통해 만나보는 시간

과신대 사람들


이번 달에는 제3회 과신대 포럼에서 강의를 해 주신 감신대학교의 박일준 교수님을 인터뷰했습니다. 얼마 전에는 저희 과신대 자문위원으로 섬겨주시기로 했습니다. 평소 과학과 신학에 대한 연구뿐 아니라 학제간 연구에 관심이 많으신 교수님을 만나뵙고 최근 관심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듣고 싶은 이야기는 많았지만 시간이 부족해서 많이 아쉬웠습니다. 다음 기회에 교수님의 강의를 들을 기회가 또 있겠죠~ 


인터뷰어 | 백우인, 심기주 기자

인터뷰이 | 박일준 교수

사진/글 | 심기주 기자



Q: 교수님이 번역하신 자연주의적 성서해석학과 기호학: 해석자들의 공동체에서 해석자들의 공동체가 바울 공동체를 뜻하는 것으로 읽었습니다. 요즘 바울에 대한 책이 많이 나오고 있어요. 정의에 대한 해석도 새롭게 해석하고 있고요. 교수님도 정의에 대한 책을 내셨는데 거기서는 정의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설명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A: 시중에 나와 있는 바울에 대한 책은 바울에 대한 것이지 바울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죠. 바울 공동체와 바울이 같은 것은 아니예요. 초대교회를 얘기하는 이유 중 하나는 초대교회가 공동체였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 공동체끼리 모여서 존재하지 않았던 생각들을 공유하기 시작하죠. 그 사람들이 모여서 공동체라고 말했던 아이디어는 지금의 아이디어와는 다릅니다.


남자와 여자가 모여서 같이 예배를 드리고 이러는 게 지금은 굉장히 자연스러운데, 그 당시에 여자는 존재가 아니니까 같이 모여서 뭘 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했어요. 그것이 기존의 상상을 넘어서는 것이었고, 그 생각을 받아들인다는 건 당시의 체제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야 했죠. 지금 우리의 신앙생활은 그것과 정반대인지도 몰라요. 자기가 믿고 생각하는 바를 향해서 운명을 기투하는 게 아니고 오히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쟁취하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잖아요. 한국인들이 새벽기도를 열심히 하지만, 그 속에는 기도의 본래적인 목적, 하나님과 만나고, 대화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어요. 남편의 승진, 가족의 건강, 뭐 이런 것, 아마 기도 제목을 간추려보면 대여섯 가지 카테고리 안에 다 들어가 있을 거예요

 

우리는 오랫동안 친해져서 서로 손해 보지 않는 선에서 어울려 살고 있어요. 하지만 이것은 진정한 공동체가 아닐 수도 있어요. 공동체라고 하는 것은 (철학자 김영민의 책에 나와 있는 구별을 따르자면) 동무들로 구성되어 있어요. 오랫동안 익숙해져서 같이 사는 사람들. 그래서 그 사람이 무슨 짓을 하든지 눈감아주는 것, 그리고 그 관계가 상할까 봐 침묵하고 못 본 척 외면하는 것. 친구라는 것이 오랫동안 익숙해진 얼굴이잖아요? 그런 관계는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지만, 그 공동체는 굉장히 이기적이라고 할까요? 동무는 그와 달리 어깨동무를 하고 같이 길을 가는 사이입니다. 


그러니까 공동체라는 것은 서로가 어깨동무를 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다른 길로 나아가지 않도록 하는 그런 관계에요. 그게 없다면 공동체는 아무 기능을 하지 않아요. 그냥 속된 말로 이익을 공유하는 깡패들의 공동체죠. 그걸 위해 이익집단을 형성하고, 압력을 행사하는 거죠. 해석자들의 공동체라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보면 세상을 보고, 생각하고 그런 것을 어떻게 지향해 나가는지를 공유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해석은 우리가 세계를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한 문제죠. 정의(justice)는 하나의 샘플이겠죠. 정의라는 것은 존재하는 게 아니니까요. 정의라는 게 존재했기 때문에 우리가 정의 꿈꾸는 게 아닙니다. 정의가 실현된 적은 한 번도 없거든요. 초대교회가 대표적인 샘플이 될 수 있죠. 그들은 정의를 부르짖지 않았어요. 하나님의 공의를 얘기할 때는 있어도 정의를 부르짖은 게 아니죠. 그들은 그저 함께 모여서 예배하면서 살았잖아요. 그런데 그들의 모임 자체가 그 시대 사람들이 꿈꾸지 않았던 것을 실행하고 있었던 것이죠. 오늘날 우리들의 교회 공동체가 그런 차원을 갖고 있느냐? 그건 참 어려운 질문이죠. 그걸 갖고 있어야만 기독교 공동체라고 획일적으로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적어도 교회의 중요한 정의(definition) 중 하나임에는 분명해 보여요. ‘남들이 꿈꾸지 않는 어떤 것을 꿈꿀 수 있도록 하고 그것을 향해 함께 달려나가는 공동체’.

 


Q: 그러니까 말하자면 현재의 상황이 정의롭지 못하기 때문에 오히려 정의를 말한다고 볼 수도 있겠네요?

 

A: 현재가 정의롭지 않다는 자각 자체가 많은 경우 기존의 우리들의 판단일 수 있어요. 초대교회의 기준을 얘기했던 이유가 그런 거예요. ‘현재 이런 잘못이 있어라고 판단하는 것은 이미 선과 악의 기준이 거기에 투사되어 있어요. 그런데 예를 들면 초대교회의 여자들을 하나의 인격으로 존중하지 않는 것은 비도덕적인 행위가 전혀 아니에요. 그 시대 사람들은 동등하게 만나서 예배를 드린다는 개념이 아예 없었어요. 예를 들면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을 놓고 유대인들이 묻잖아요? 이 여자를 어떻게 할까요? 뭘 어떻게 해요. 법에 쓰여 있잖아요? 그리고 그게 상식이고. 율법에 돌로 치라고 되어 있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은 그냥 법대로 하라고 그러면 돼요. 법대로 해야 하거든요. 답이 정해져 있어요. 옳고 그름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할 필요가 없는 거죠. 그런데 예수님은 거기에 대해서 법대로 하라고 안 했거든요. 그 당시 사람들의 기준으론 대답이 황당하고 엉뚱했죠. 그 뒤의 얘기는 우리가 다 알죠. 죄 없는 사람들이 먼저 돌을 들어 치라고 하니까 다 도망갔다고. 거기서 도망친 사람들이 비겁해 보이긴 하지만 도망갈 수 있었던 것도 하나의 용기인지도 몰라요. 아무나 그렇게 할 수 있는 건 아니거든요. 거기서 현실이 부정의하다는 인식으로부터 생길 수도 있지만, 누군가의 얘기 때문에 뒤로 물러서면서 정의를 말할 수도 있거든요. 그래서 대략적으로는 말씀하신 것이 맞기는 해요. 그런데 중요한 맥락에서 혼동될 수 있어요.

 

 


Q: 학제간 연구 혹은 융합학이라는 말을 많이 쓰잖아요? 이런 것이 학문 하는 데 있어서 어떤 필요성이 있을까요?

 

A: 굉장히 단순한 이유죠. 가장 기본적으로는 내가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언어를 이해해야 해요. 사람이 살아가면서 남녀 간에도 그렇잖아요?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 그러면 그 사람을 위한 언어나 어투나 마음가짐 등이 익숙해질 필요가 있거든요? 그런데 만약에 그게 안 통한다 그러면 시작조차 못하겠죠. 그래서 아마 과학과 신학의 대화도 현재 연구재단 등에서 하는 융복합이라는 말과 학제간이라는 말과는 다른 측면이 있는 거예요. 예를 들면, 우리 시대의 안락사, 낙태, 동성애 문제를 얘기할 때, 신학자가 아니면 윤리학자가 앉아서 자기의 지식만으로 결정할 수가 없어요. 삶의 문제는 복잡하게 연관되어 있는데 우리가 갖고 있는 지식 체계는 한쪽으로만 전문화되어 있잖아요? 이게 100년 전부터 제기된 프로페셔널리즘(professionalism)의 문제거든요. 예를 들어서 천체물리학을 전공한 사람이 안락사의 문제에 대해서 자기의 정치적인 성향을 섞어서 얘기한다고 할 때 생기는 문제는 지식인을 가장한 사이비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런 걸 할 때 자기의 한정된 지식에 근거해서 잘못된 판단을 내리기보다는 이 문제를 다른 측면에서 말할 수 있는 사람과 만나서 서로 뭔가를 같이 결론 없이생각해보는 거죠


현재 연구재단 등에서 얘기하는 융복합(fusion)이라는 것은 제 생각에는 가능할지 잘 모르겠어요. 예를 들어서 안락사 문제나 동성애, 낙태 문제를 얘기할 때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이 결혼과 비슷한 것 같아요. 결혼할 때 둘이 하나가 되는 것처럼 주례사를 하잖아요. 그런데 이 건 가장 잘못된 주례사 중 하나에요. 둘이 하나가 되면 하나의 목소리가 억눌리는 게 대부분인 거 아닌가요? 누구의 목소리가 억눌리는 것은 둘 사이의 관계의 정치학에 달려있어요. 하나의 목소리가 다른 목소리를 대변하고 다른 한 목소리는 억압되고. 그러니까 둘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제국이나 인간 조직에서 가부장적인 질서체계를 좋아하는 사람이 하는 말이고, 실질적으로 결혼 생활은 둘이 하나가 되는 게 아니고 둘이 둘이 되는 거예요. 내가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넘어서야 해요. 융복합이라는 말이 복합을 존중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면 괜찮겠지만, 대부분 우리가 쓰는 의미는 여러 학문이 모여서 하나의 목소리를 내고 그것들이 모여서 또 상위의 것을 만드는 그런 개념이면 곤란합니다. 여러 가지 다양한 것들이 모이면 그것 자체가 새로운 관점을 만들어주거든요.

 

보스턴 대학의 신학 교수 웨슬리 와일드먼(Wesley J. Wildman)Inter라는 말을 이제 쓰면 안 된다고 했어요. 예를 들어 안락사 문제를 얘기할 때, Inter라는 말은 둘 사이라는 말이거든요. 예를 들어, 과학과 신학 사이라는 건데 과학도 하나가 아니거든요. 여러 분야가 있고, 신학도 여러 분야가 있는데. 그래서 Inter라는 말 대신에 multi라는 말을 써야 한다는 말을 했어요. 그래서 multidisciplinary studies라고 얘기할 때는 여러 개를 그냥 짬뽕시킨다는 것이 아니고, 어떤 사태를 복잡하고 중층적으로 바라보자는 제안이죠. 90년대부터 사태를 획일적으로 보기보다는 중층적으로 까다롭게 보자는 생각들이 지식인들 사이에는 있었는데 여전히 많은 사람은 단순하고 쉽고 모든 것을 하나로 엮어서 설명하는 것을 자꾸 찾죠. 거기에 시대적인 괴리감이 좀 있어요. 아직도 학제간의 대화라는 말을 쓰긴 하는데 이건 마치 둘이 하나라는 말처럼 사실 잘되지 않는 경우가 많아요.

 


 

Q: 아까도 잠깐 페미니즘에 대한 얘기를 하셨고, 저번에 장신대에서 캐서린 켈러(Catherine E. Keller) 교수도 오셨을 때, “신학과 페미니즘의 대화라는 주제로 열린 강좌에서 교수님의 강연을 들었었는데요. 페미니즘에도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있으신가요?

 

A: 특별한 계기는 없는 것 같아요. 여기서 신학 공부하는 사람들은 특별한 계기라기보다는 풍조가 그런 것 같아요. 초대교회 때 비존재로 간주되던 이들을 기독교는 말하자면 형제와 자매로 불렀던 거잖아요. 아무도 그들이 서로 동등한 인격이라고 말하지 않았거든요. ‘내가 귀족으로 태어났는데 내가 그 사람을 노예로 만든 것도 아니고 더 착취한 것도 아니야.’ 그러면 내가 그 사람을 하대하고 노예처럼 대해도 비윤리적인 것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비존재로 간주되는 사람을 나와 동등한 존재로 간주한다.’ 거기에 이제 말하자면 페미니즘의 기본적인 출발점이 있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페미니즘과 신학적으로 비존재에 대한 관심이 좀 다른 건, 페미니즘은 여성이 이제까지 무시당했던 당연히 찾아야 할 인권에 관심이 많다면, 신학적으로 여성이나 비존재를 다룰 때는 모든 사람의 인권의 관점이 아니고, 나와 동등한, 혹은 나와 반대로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타자에 대한 관심이예요


예를 들어 귀족이 노예를 이해할 수 없죠? 우리가 지금 인권의 시대에 살고 있지만, ‘저 사람이 나와 동등한 인권을 가졌어에서 출발하는 게 아니에요. 내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을 나와 동등한 사람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사랑에 훨씬 가깝지 않을까요? 내가 저 사람과 사랑을 하고 있다는 것. 사실은 우리들 마음속에 사랑을 한다고 하면, 리차드 도킨스의 이론을 적용하면 유전자가 나로 하여금 어떤 대상에게 성적인 매력을 느끼도록 하는 것뿐이잖아요? 그래서 본능에 의해서 기계화된 과정속에 사랑한다는 생각이 생긴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설명인데요. 그런데 그게 꼭 그렇지만은 아닌 게 어떻게 보면 우리가 사랑한다는 말은 우리가 알고 있는 전통적인 기계화된 과정에서 생겨난 잉여인 것 같아요. 많은 사람이 사랑한다고 얘기하지만 모두가 다 알 듯이, 모든 것이 다 본능적이고 충동적인 측면만 갖고 있는 것은 아니거든요. 예를 들어서 유전자적인 측면에서는 내가 이러이러한 타입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는 화학적으로 사랑에 빠질 수 있어야 해그런데 모든 사람과 그런 게 다 발동하는 건 아니거든요. 그럼 구체적으로 내가 왜 이 사람과 사랑을 하게 되었을까라고 하는 것에는 물론 생물학적인 토대도 있지만 그 위에서 전혀 변별할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거에요. 예를 들어서 내가 생물학적 남자니까 앞에 있는 사람을 보고 기본적으로 기계적인 생물학적인 과정으로 성욕이 발동을 해서 사랑이라는 과정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왜 모든 이들이 아니라 하필 너인 거지?’라고 물어봤을 때 그건 모른다는 것이에요. 상대방에 대한 인식을 전혀 알 수 없는 거죠. 나와 다른 존재인데 그 존재를 안다고 했을 때,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만 안다고 하는데 그건 내 생각이지 상대방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죠.

 

우리 시대 기준으로는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있잖아요. 있는 사람은 무엇인가? ‘To be’. 우리 시대 사람으로 말한다면 예를 들어, 명문대생이고, 소위 말하는 대기업 다니고 통장 잔고에 얼마가 있고. “있는 사람들이죠. ‘존재하는 사람들이죠. ‘타메온테하나님은 없는 사람을 선택한다고 했지 있는 사람을 선택한다고 하지 않았거든요. 없는 사람들은 말 그대로 Those who are not. 존재하지 않는 거에요. 있는데 없는 사람 취급하는 거죠. 이게 묘하게 자본주의의 있는 사람, 없는 사람 이미지와 비슷하다는 거죠. 그러니까 사실 페미니즘이라는 것도 그런 의미 아니겠어요?

 

인권이라는 것도 기존의 어떤 도덕적인 판단을 전제로 하잖아요? 그런데 존재하지 않는 자들을 인식한다는 건 기존에 없던 상상력이어야 하죠. 그래서 우리가 남성이냐 여성이냐를 전제하는 이야기가 기존에 우리가 판단하는 있고 없음, 기존의 도덕적 윤리적인 시스템과 맞물려 있다는 얘기죠. 그런데 페미니즘이 진짜 페미니즘일 수 있으려면 도너 해러웨이나 로지 브라이도티 등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동물들, 식량으로 쓰이기 위해 닭장을 평생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들, 이제껏 듣지 못한 환경의 소리 등 이 시대에 비존재로 간주되는 것들이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거죠. 우리는 남자는 특권층이라는 것에서 벗어나서 비존재들을 볼 수 있어야 해요. 예를 들어, 한국 사회에서 남자는 인구의 절반이 아니라 가부장적인 사회에서는 정점에 있는 한 남자에요. 그래서 정점에 있는 남자의 특권이 맨 아래에 있는 남자가 갖고 있지는 않거든요. 페미니즘의 기본은 가부장제를 극복하는 거지, 가부장제를 예속해서 그 사람들을 파문하는 게 아니잖아요?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존재한다고 믿지만, 한 번도 존재한 적은 없죠. 다만 이게 아닌데하는 걸 우리가 현실에서 보면 이건 아닐 것 같다는 느낌, 감정그런 건 있죠. 이것이 도덕이나 윤리와 다른 점이죠. 도덕이나 윤리는 기존에 우리가 가치 판단하는 기준이 있어요. 그런데 비존재는 사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상식을 가지고 가면 파악이 안 됩니다. 기존의 판단 기준이 없는 것을 가지고 가서 정의이나 사랑 평화 등을 판단하려면 거기에 모든 이 가치 판단의 기준을 넘어서는 어떤 초월의 소리가 있을 수밖에 없거든요. 그래서 요즘의 철학이 신학으로 귀환하는 중이에요. 자크 데리다도 말년에 환대라든지 선물이라든지 굉장히 신학적이었거든요. 타자를 우리가 받아들이는 환대,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순간은 선물이라든지. 데리다가 원래 해체로 유명한데 말년에는 굉장히 신학적인 시각을 많이 보여줬어요.

 

  

Q: 이번에 과신대 자문위원이 되셨잖아요? 과신대가 과학과 신학의 대화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들을 키우는 일도 하고 있거든요. 혹시 사역이 확장되었으면 좋겠다 하는 부분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A: 과학과 신학이라는 주체의 만남을 얘기한 것은 꽤 오래되었어요. 하지만 이 모임이 한 번도 실현된 적이 없었어요. 신학자들이 과학에 무식한 경우가 많고, 과학자들은 신학에 무식한 경우가 많아서 서로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요즘 이슈인 동성애 문제가 나오면, 자꾸 교리나 성경을 찾는 사람들에게 각자의 입장에서 어떻게 반박하는가, 침묵하는가, 이렇게 정치적으로 변질이 되거든요. 그래서 사실 과학과 신학이 만나서 그런 이야기를 어떻게 복합적이고 중층적으로 생각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모임이 정말 긴급히 필요합니다.


그래서 과학과 신학의 대화를 좀 더 진척을 시킨다면 신학자들이나 인문학자들과의 담론의 틀을 만들 수 있을 겁니다. 우리 사회의 지식인 중에 이렇게 우종학 교수님처럼 평신도인데 이런 모임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도 있다는 게 신선했어요. 사실 종교개혁이 평신도들의 참여로 가능했거든요. 앞으로 한국 사회, 한국 기독교에 큰 역할을 하실 것 같아요.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언제라도 기꺼이 새롭게 숙고하기


『아담과 하와의 잃어버린 세계』 (존 H. 월튼, 김광남 역, 새물결플러스)


서평 | 백우인 (과신대 교육/출판이사)



시대의 변화는 떨어지는 물방울에 돌이 닳듯이 천천히 변하기도 하고 엄청난 해일이 돌을 산산조각 내는 대격변이기도 하다. 생명과학의 기술이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인간의 사유가 쉽게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오늘날,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논쟁들 가운데 하나는 성서와 과학과 인간의 기원과의 관계가 아닐까?


월튼은 성서 자체는 변하지 않을 지라도 오늘날 성서에 대한 우리의 해석이 훨씬 더 역동적이며 그로 인해 나타나는 신학이 계속적인 재평가를 받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성서 해석자이자 신학자로서 신학적 전통이 중요하지만 해석과 해석의 도구로 삼고 있는 해석학조차 시대를 따라 변해왔다고 말하면서 새로운 통찰과 정보는 어느 때라도 나타날 수 있다고 말한다. 


과학은 150년 동안 혁명적인 변화를 겪었다. 진화론은 발전의 시작이었고, 유전학의 발전은 유전자의 염기서열을 비교함으로서 인류의 공통 조상을 찾고, 21세기 초 인간 유전체의 정보를 읽어내는 인간게놈 프로젝트가 완료된 후 생명과학기술은 놀라운 속도로 진보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인간이 직접 유전체를 합성하여 인간을 비롯한 생명체를 창조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 ‘포스트게놈 시대’를 살고 있다.


인류의 진화 역사는 어떨까? 수 백 만년 동안 계속 되어온 인류의 진화 역사에는 커다란 흐름이 있다. 그 흐름은 직선이 아니라 꼬불꼬불한 발자취를 보여준다. 진화의 역사의 방향에 정답은 없다. 이상희 박사는인류의 기원에서 “진화에 유익한 형질, 적응에 유리한 형질은 우연의 작품이다. 우연히 이루어진 환경의 변화 속에서 마침 우연히 생겨난 형질이 유익했고 유익한 형질을 가지고 있는 개체가 더 많은 자손을 남겼을 뿐이다. 어느 한 때 유익하다고 영원히 유익하지 않다. 모든 것은 변한다. 그때 적합한 선택을 해서 앞으로 나아갔던 것뿐이다.” 라고 말한다. 


월튼의 『아담과 하와의 잃어버린 세계』는 인간 기원 문제로 고민하는 수많은 그리스도인에게 인지부조화의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다. 그는 인간의 기원에 관한 현재의 합의에 의해 제기되는 위협은 과장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과학의 원칙에 의거한 과학의 합의가 의심스러울 경우 이를 맹목적으로 수용해서도 안 되지만 과학의 결론들이 성서의 믿음에 어떤 위협도 제기하지 않는다는 이해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고대 문서로서 또한 경전으로서의 성서에 대한 면밀한 읽기를 수행하면서 창세기에 초점을 맞추지만 실제로는 경전 전체를 고려한다. 성서에 대한 충실한 읽기를 통해 이런 읽기들이 과거의 몇 가지 전통적 읽기와 얼마 간 다를 수 있지만 그 다름 또한  본문 안에서 지지를 발견할 뿐만 아니라 최근의 과학적 발견 중 어떤 것은 우리가 고대 근동이라는 상황 속에서 발견하는 것과도 양립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컨대, '성서와 과학이 인간의 기원에 관해 상호 배타적인 질문을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현재의 과학적 합의는 인간이 다른 종들과 공통 조상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인데, 이는 물질적(계통 발생적) 연속성이라는 증거에 기초한 주장으로 성서 본문에 대한 면밀한 읽기와 신학적 연구는 그것들이 이런 물질적 연속성과 공통 조상을 감안하고 있음을 지적해왔다고 말한다. 창세기를 고대 근동의 문헌으로 신중하게 읽는 일은 공통혈통과 본질적으로 충돌하지 않는 역사 또는 인간 게놈을 통해 관찰 할 수 있는 역사로부터 얻어지고 또한 그것으로부터 추론되는 주석적 결론과 신학적 확언을 낳는다고 주장한다.


월튼은 성서의 내용을 그 문화적 상황이나 현대의 과학과 일치시키도록 강요해서는 안 되며, 고대 세계의 문헌으로부터 나온 정보나 과학적 탐구를 통해 얻은 통찰이 우리로 하여금 성서로 돌아가 우리의 해석을 재고하도록 적절하게 자극할 수도 있음을 주장한다. 『아담과 하와의 잃어버린 세계』는 성서본문은 전통으로부터 나름의 자율성을 지녀야하고 언제라도 기꺼이 성서 본문으로 돌아가 이를 새롭게 숙고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성서의 권위에 관한 견고한 확신과 성서의 해석 위에 세워진 전통을 바탕으로 작업하지만 신학적 틀 내부에서는 성서본문을 새롭게 읽을 수 있는 여지가 많다는 것이다. 



월튼은 이 책 아담과 하와의 잃어버린 세계 에서 창세기 서두를 읽을 때 두 가지 사항에 유의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첫째, 창세기를 현대 과학의 기준으로, 즉 과학책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 둘째, 창세기는 고대 근동의 세계관에 공통 바탕을 둔 고대의 문서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유감스럽게도 많은 그리스도인이 이 두 가지 기초적인 사항을 외면하고 창세기를 읽은 결과, 고대 근동 문화와 세계관의 기반 위에 쓰인 성서의 이야기를 현대 과학의 관점에서 문자적으로 오독하는 우를 범한다. 그 대표적인 형태가 바로 소위 젊은 지구 창조론으로 대표되는 창조과학 현상이라고 지적한다.


창세기는 고대 문서이다. 성서의 권위는 불가피하게 저자의 의도와 연결되어 있다. 다시 말해 창세기를 읽을 때 고대문서를 읽는 것이며 따라서 고대 세계에서 적절했던 가정들을 사용하는 것으로 시작해야한다. 고대인들이 어떻게 사고했는지 그리고 그들의 소통의 근간을 이루는 개념들이 무엇이었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월튼에 따르면, 창세기 1장이 말하는 기원 이야기는 물질적 우주보다 질서, 기능, 역할 등과 연관되어 있다. 창세기 2장은 에덴동산으로 알려진 성소라는 지구의 중심의 설립에 대해 이야기 한다. 아담과 하와는 성소를 섬기는 제사장이며  모든 인간을 상징한다. 그러나 그들이 스스로를 하나님의 자리에 세워 질서의 중심이 되려는 죄를 짓는다. 말하자면, 창세기 3장은 최초의 죄에 관한 이야기라기보다 질서가 잡히는 과정 중에 있는 세상 속으로(죄에 의해 초래된) 비질서가 잠식해 들어오는 일에 관한 이야기,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어떻게 멀어지게 되었는지에 관한 이야기이다. 창세기 1장부터 3장까지의 이야기를 통해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소명을 받아 선발된 문자적 의미에서 최초의 인류가 아니라 인류 전체의 운명을 테스트할 대표자로서 선발된 원형적 존재이며, 또 아담이 원형적 존재일 때만 구약 이스라엘과 신약의 메시아인 예수 그리스도가 원형적 존재로서 온 세상의 운명을 짊어진 존재라는 사실이 확증된다.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