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주의 무신론이 팽배한 현대사회에서

복음의 변증과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을 위해

건강한 창조신학을 세워가며 교육하고 연구하는

[과학과학의] 사역을 지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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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론자들 (로널드 L. 넘버스, 신준호 외 역, 새물결플러스)


서평: 이광형 (장로회 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졸업, 동 대학원 구약학 Th.M 재학 중, 초원교회 교육 목사)




무오(無誤)에서 무지(無知)로


먼저 이 책의 제목에서 ‘창조론자들’이라는 말은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창조를 믿고 신앙하는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닌 ‘과학적 창조론’ 혹은 ‘창조과학자’들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나는 사실 이 책의 저자인 로널드 넘버스가 어떤 사람인지 몰랐기에 책을 읽기 전에는 아마도 창조과학 쪽에 있는 사람들의 주장이 어떤 면에서 틀렸는지 학문적으로 비판하는 책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 책은 어느 쪽 주장에 대해서 (적어도 명시적으로는) 옳고 그름을 논하려는 것이 아닌 창조론자들이 어떤 신학적 노선 안에서 시작하여 어떤 길을 걸어왔고 이제 거기에 ‘과학’이라는 이름까지 붙이게 되었는지를 서술하는 일종의 사상사 내지는 그들의 발자취를 기술한 책이다. 로널드가 과학사/의학사 분야의 교수라는 점에서 이해하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책을 읽는 내내 로널드라는 사람의 철저한 자료조사에 감탄을 금치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창조론자들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정말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알고 또 거기에 명확한 근거들을 대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서문에서 자신은 원래 근본주의적인 제7일안식일예수재림교의 목회자 가정에서 태어났고 과학을 전공했지만, 창조론을 주장하던 사람이었음을 밝힌다. 그러다가 창조과학자들이 흔히 주장하는 젊은 지구론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경험하게 되면서 창조과학에서 돌아서게 된 이야기를 밝힌다. 그러므로 책의 내용 자체는 객관적인 서술을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창조과학자들이 어떻게 지난 1세기 동안 어떻게 자신들의 자리를 만들어왔는지 또한 자신들의 위치를 확고히 하기 위해 어떻게 증거를 왜곡하고 조작했는지 그러면서 어떻게 세계 곳곳으로 확장해 나갔는지를 여과 없이 보여줌으로 저자가 반창조과학적인 입장에 서 있음을 보게 된다.


최근에 SNS에서 활발하게 활동을 펼치는 우종학 교수를 중심으로 많은 기독교인, 신학생, 목회자들이 창조과학에 대해 다시 재고하게 되고, 그들의 오류에 대해서 알게 되어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대부분 창조과학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입장을 비판할 때, 그들이 성경에 대해 ‘문자주의’ 혹은 근본주의자들이라고 이야기한다는 점이다. 이 책에서도 근본주의자라는 말들이 서슴없이 등장한다. 근본주의 운동은 사실 유럽으로부터 건너온 급진적 자유주의의 신학 사조에 맞서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까지 미국에서 전개된 운동이다. 한국에서는 소위 자신들을 개혁주의라고 자처하는 보수 신학계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고, 이는 주로 신학계에서 사용되는 용어이다. 그런데 이러한 근본주의라는 말이 바로 이 창조론자들(창조과학자들)에게 적용될 뿐만 아니라 이렇게 까지 깊은 연관성을 보여주는 것에 흥미로웠다. (물론 성서해석의 측면에서 당연할 수 밖에 없지만 말이다)


그러나 창조과학을 공격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좀 더 분명히 해야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창조과학은 단순히 문자주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혹은 근본주의자=문자주의자라는 생각이다.


옥스퍼드의 구약학 교수를 지냈던 제임스 바(James Barr)는 그의 『근본주의 신학』이라는 책에서 날카로운 지적을 하고 있는데, 근본주의자는 “성서를 문자적으로 취급”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근본주의자들과 다른 사람들의 차이점은 문자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오성에 있다. 여기서 성서의 무오성이라 함은 성서가 과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나 한 치의 오류도 없음을 지키고자 하는 교리다. 실제로 근본주의자들의 성서 해석을 보면 모든 성서를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그들은 성서의 무오성을 지키기 위해 성서의 과오를 인정하지 않는 방법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근본주의자들은 성서에 대한 문자적 해석과 비문자적 해석 사이를 왔다갔다 한다. 다시 말해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것은 무오성이지 문자성은 아닌 것이다. 이것은 『창조론자들』 을 통해서도 어느정도 알 수 있다. 나도 한 때 한국의 창조과학자들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들은 성경이 ‘정확무오’하다는 이야기를 심심치 않게 한다. 결국 그것은 그들이 근본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뜻이 된다.

이 책에서 흥미로웠던 점은 창조과학자들이 과학자가 되는 과정 속에서 이들이 바로 안식교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또한 이들은 처음에 미국 학교에서 진화론을 가르치는 것에 대해 매우 공격적인 전략을 택했으나 후에는 전략 노선을 수정하여 정치적인 압박을 통해 오히려 창조과학을 학교의 공교육에 넣으려고 했다는 사실도 매우 흥미롭게 읽었다.


그것은 곧 창조론을 ‘과학적 창조론’ 혹은 ‘창조과학’으로 명명하면서 자신들의 방향을 과학의 방향으로 몰고 가려 애썼으며, 과학으로 재포장하려 했다는 것. 게다가 그러한 과정 속에서 창조과학자 버딕은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박사 학위가 필요 했는데, 애리조나 대학에서 박사는커녕 석사 학위도 받지 못했고, 결국 실체도 없는 대학의 박사학위를 받은 것으로 속이게 된다. 이러한 창조과학자들의 역사에서 결국 창조론자들이 걸어온 발자취는 그들이 성서에 대해 확고한 신앙만큼 행위가 따라가지 못하는 거짓된 자들임을 보여주며, 창조과학에 ‘과학’이라는 이름은 적어도 붙일 수 없는, 적어도 과학에 있어서는 비전문가들로 구성되었음을 보여준다.


로널드가 서문에서 밝힌 것처럼, 책의 말미는 증보판에 덧붙여진 내용인데, 지적설계와 창조론자들의 최근 흐름 및 창조과학자들의 세계 지형도까지 안내하고 있다. 더불어 교회 안에 창조론자들이 어떻게 침투하였는지, 또 주요 교단들에게 미친 영향도 소개하고 있으며, 가톨릭과 유대교에게도 어떤 관계를 맺었는지까지 보여준다.


그러나 가장 흥미를 끌었던 점은 창조론의 세계화 부분에서 ‘한국’까지 다루고 있다는 점이었다. 로널드는 아시아에서 특별히 한국인들이 창조과학자들을 위한 발전소 역할을 하고 있다고 평가하며 ‘한국창조과학협회’ 이야기까지 상세하게 다룬다. 특히 1990년대로 넘어와서 서울에서만 1500여회의 세미나를 개최했다는 사실에서 한국은 적어도 아시아에 있어서는 “창조론의 수도”라고 명명할 수 있을 정도라고 로널드는 평가한다.


창조과학자들의 무서운 점은 그들이 ‘과학’으로 승부가 나지 않아서인지 법률적, 정치적 공세를 폈다는 점이다. 로널드는 미국 여러 주의 공화당원들이 자신들의 공약에 창조론 항목을 추가했고, 창조과학자들은 미국 전역에서 지역 교육위원회의 선거에 출마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여기까지 읽었을 때, 필자가 장로회신학대학원을 다니던 시절이 잠깐 떠올랐다. 매 학기 초마다 열리는 신앙 사경회의 선택 특강 시간에 유명한 한국의 창조과학자의 강의가 포함되어 있었던 불과 몇 년 전의 일이 떠올랐다. 적어도 장신대의 조직신학 및 성서학의 입장은 그러한 근본주의적 영향과는 매우 거리가 먼데, 어떻게 그들이 신학교 안에까지 들어와 강의를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커다란 수치를 느끼면서도 창조론자들의 책을 통해 그들의 정치적 공세는 아니었는가 음모론 아닌 음모론도 생각해보게 되었다.


무엇보다 성서를 근본주의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 좋은 것은 아닌데, 가장 무서운 점은 표면적으로 볼 때 그들의 신앙이 더 좋아보인다는 점일 것이다. 그러나 『창조론자들』은 그들의 포장을 벗겨내고 그들의 속내를, 그리고 그들이 지나온 과거를 정확하게 볼 수 있도록 해준다는 점에서 이 책이 가진 의의는 크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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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론 연대기 (김민석, 새물결플러스)


김영웅 

(포스텍 분자 생물학 박사, 미국 City of Hope에서 백혈병 연구)



일주일 만에 배송이 되어 (여긴 미국이다), 기대감으로 책을 순식간에 읽어 버렸다. 너무나 맛있는 음료를 마셨는데도 계속해서 빨대를 빨고 있는 기분이랄까. 책이 길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찐하게 남는다


성인이 되어 만화책을 본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어제 점심 시간에 카페테리아 구석진 곳에 앉아 혼자 밥을 먹으면서 키득키득대며 읽었는데 ( 사람이 힐끗힐끗 쳐다보는데, 어쩔 없었다. 그런 것따위 신경 겨를이 내겐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재미있게 권을 읽어본게 언제였던가 싶다. 김민석 작가의 실력에 경탄을 금할 없었다.


책은 만화만이 가진 장점을 최대한 살리고 있다. 풍선 안에 적힌 문장들을 모두 합한다고 해도 위에 언급한 책이 가진 텍스트의 반의 반의 반도 안되겠지만, 책이 전달하는 임팩트는 그에 못지 않다. 만화는 글뿐 아니라 그림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물들의 표정과 행동에서, 그리고 인물들이 활동하는 시간과 공간으로부터 우리들은 글로는 충분히 표현할 없는 무언의 감정을, 마치 브레인을 통과하지 않는 것처럼, 빠르게 게다가 아주 효과적으로 느낄 있다 (실제 만화를 보며 우린 우리 자신을 만화 시공간에 배치시키지 않는가!). 그것은 오디오와 비디오의 차이로 설명할 수도 없고, 글과 그림의 차이로도 설명이 충분하지 않다. 만화만이 있는 유닉한 파트가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다. 만화 작가의 입장에선 풍선 안에 담을 글을 최대한 요약할 알아야 하고, 이를 위해선 정확하고 좋은 문장을 선별할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런 능력은 모두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이름도 빛도 없이 묻힌 작가의 부단한 연구와 성실한 노력이 선행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김민석 작가에게 박수를 보내지 않을 없다.

개인적으론 무크따와 아론의 송아지를 먼저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시간이 지나면서 진화론과 창조론을 이해하는 있어 중요한 개념들과 역사적 사건들을 대다수 잊어버리게 되었는데 ( 책이 설명을 못한 아니라, 나의 롱텀 메모리 능력이 바닥이라고 그런 거임), 창조론 연대기를 보며 아주 선명하게 개념이 다시 기억이 나고 정리가 되었다. 물론 무크따와 아론의 송아지에서도 중간중간에 도표와 그림을 삽입시켰지만, 창조론 연대기에서 보여준 만화 정리는 정말 내겐 통쾌하고도 명쾌했다. 역시 만화만이 가진 매력이 분명 존재하는 거다. (새물결플러스에서 지속적으로 만화를 매개로 하여 신학, 과학, 인문학 등을 지속해서 출판해 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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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론의 송아지 (임택규, 새물결플러스)


서평: 김영웅 (포스텍 분자 생물학 박사, 현 미국 City of Hope에서 백혈병 연구)



먼저, 무크따를 먼저 읽고 아론의 송아지를 읽게 된 순서는 아주 바람직했던 것 같다. 출판된 시기가 그렇지 않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아직 두 권 모두를 읽어보지 않은 사람들의 독서 방향에 있어선 하나의 힌트가 될 수도 있겠다. 개인 교습으로 입문을 했다면, 이제 재미나고도 적절한 비유와 예시를 동반한 강연을 들을 차례다.


앞서 언급했듯이, “아론의 송아지”는 하나님을 눈에 보이는 형상 속에 가두어 버리는, 우매하고도 이기적인 인간의 속성을 반영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가 시내산에서 오랫동안 내려오지 않자 불안해져서 그들이 지니고 있던 금 조각을 모두 모아 아론을 중심으로 송아지 형상을 만들어 그것을 하나님이라 명하고 의지하게 되는 사건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 저자는 그 기록으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어 젊은 지구론으로 대변되는 창조과학을 이스라엘 백성에 대치시키고, 송아지 형상을 성경의 문자에 대치시킨다. 하나님을 근본적으로는 믿지만, 그 믿음이 너무나 근본주의적이어서 문자 그대로를 믿게 된 무속적인 기독교인들이, 하나님과 기독교를 보호한다는 명목 하에, 만들어낸 창조과학이 실제로는 하나님을 성경에 씌여진 문자 속에 가두어 버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책에서 저자는 아주 적실하게 꼬집어 낸다.


이 책의 부제인 “젊은 지구론에 대한 합리적 비판”에서도 쉽게 읽어낼 수 있듯이, 이 책의 메인 타겟은 젊은 지구론으로 대변되는 창조과학이다. 그 그룹에 속한 비합리적이고 비과학적이며 하나님과 기독교를 스스로 보호한다고 할 만큼 영성이 지나치게 높은, 자칭 기독교인이라 하는 사람들의 무속적인 면을 하나씩 파헤친다. 그러나 아무런 배경 지식이 없는 사람이 읽어도 쉽고 재미있게 술술 읽을 수 있을만큼 저자의 글쓰기는 탁월하다. 요즘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라면, 세상 돌아가는 흐름을 대충이라도 읽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신을 믿든 안 믿든 상관없이, 이 책을 읽을 땐 아마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되리라 생각한다. 제목부터가 성경에 나오는 단어이기 때문에 지레짐작하며 책을 멀리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묵직한 주제를 저자가 가진 쉬운 번역 (어려운 내용을 이해하기 쉽게) 기술로 인하여 대중적으로 재미나게 접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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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론 기자, 크리스천 과학자에게 따지다 (우종학, IVP)


서평 | 김영웅  (포스텍 분자 생물학 박사, 현 미국 City of Hope에서 백혈병 연구)


본격적인 이야기는 어느 신문사 과학부를 담당하고 있는 박 기자라는 나한교 (나도 한때 교회 다녀봤어)가 우연찮게 그의 과거 주일학교 선생이자 현재 대학 교수인 한 별 박사의 저서 소개 기사를 작성하는 일을 맡게 되고 인터뷰까지 직접 하게 됨으로써 시작이 된다. 오랜만에 만난 사이, 세월이 벌려 놓은 서먹한 둘 사이의 간격은 비단 과거 선생과 제자 간격이나 현재 교수와 기자 간격만은 아니었다. 세월은 그 둘을 신앙인과 비신앙인,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으로도 갈라놓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갈라놓은 원인의 무게중심은 수동적 의미의 세월이란 요소뿐 아니라 능동적 요소라고 할 수 있는 '과학과 신앙에 얽힌 해묵은 편견'에도 있다고 봐야 것이다 (이렇게 해석하는 이유는 이 책의 요지와 잘 부합하지 않을까 생각해서다. 저자가 왜 하필이면 한 교수를 박 기자의 과거 주일학교 선생으로 설정했겠는가. 무엇보다 이 책의 부제는 '과학과 신앙에 얽힌 해묵은 편견 걷어 내기'다. 이는 저자 우종학 교수님이 책 전체에 걸쳐서 일관되게 던지고 있는 메시지와도 같다).


박 기자와 한 교수의 간격은 우리들 사이에서도 존재한다. 편견은 기독교의 이름을 가진 무속신앙을 강화시키고, 강화된 무속신앙은 편견을 기정 사실화시키는 강력한 교주 역할을 한다. 악순환의 고리에 의해 그 교주의 힘은 점점 막강해져서 한국 기독교라는 옷까지 입고 교인들에게 그들이 기정 사실화시킨 편견을 복음과 함께 뿌린다. 이런 의미에서 편견은 가라지와도 같다. 주인의 곡식 사랑하는 마음 덕분에 가라지는 곡식이 자라는 동안 뽑히지는 않겠지만, 추수 때가 이르면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져 불사르게 단으로 묶어질 것이다.


박 기자와 한 교수의 재회는 두 사람의 간격을 메우는 물꼬를 튼다. 첫 인터뷰에 이어진 한 교수 강연에의 참석, 또 그 이후 연이은 두 번의 만남을 통해 박 기자의 창조론에 대한 자세는 서서히 바뀐다. 그 동안 자신이 가져왔던, 과학과 신앙이 서로 대립된다는 생각이 실제로는 잘못된 편견일 수도 있겠다는 진지한 의심을 하게 되고, 그로 인하여 부차적으로 다시금 크리스천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도 그의 마음 속에서 싹트게 된다 (이는 잘못된 편견의 수정이 회심의 열매까지도 맺을 수 있는 힘도 가질 수 있다는, 또 하나의 중요한 메시지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즉, 과학과 신앙에 얽힌 편견을 제거하는 작업이 아프리카 오지에서 언어와 문화를 새롭게 배워가며 복음을 전하는 것만큼이나 전도와 선교의 중요한 축이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이런 면에서 우린 어쩌면 비기독교인들의 과거 탈기독교 과정의 메커니즘을 좀 더 연구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박 기자는 대다수의 우리를 대변하는 듯하다. 과학과 신앙의 차이를 무신론과 신론의 차이나 비기독교와 기독교의 차이와 동일시하는 한국 기독교의 암묵적이고 비합리적인 교육 체제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낼 수 밖에 없었던 우리들의 슬픈 자화상이다 ("창조론 연대기"에서 김쑤가 자기에게 상처를 준 온유와 온유 오빠를 바라보는 시선을 떠올리면 된다. “그들도 피해자야”). 우리 중에 나한교가 아니었던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박 기자와 같은 생각을 해보지 않았던 사람이 몇이나 될까? 어쩌면 박 기자는 용감한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무속적인 믿음으로 마치 우리들이 기독교의 수호자인양 과학의 합리적인 판단과 가치체계를 깡그리 무시하며, 중립적인 과학의 목소리를 사탄의 속임수와 동일시하며 귀를 틀어막고, 계속 어둠만을 쳐다보면서도 거룩한 척하며 지속하여 교회에 다니고 있진 않는가? 기정 사실화된 잘못된 편견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 제대로 된 창조주 하나님을 전하는 복음 전파가 가능하리라 생각하는가? 그 때야말로 당신이 제 2의, 제 3의 교주가 되는 순간 아니겠는가! 이런 부분을 잘 잡아낸 책 제목, "아론의 송아지"에서도 저자, 임택규가 이런 웃지 못할 상황에 대해서 얼마나 답답했으면 프롤로그에서부터 "우매함은 악보다 훨씬 위험하다"라는 디트리히 본회퍼의 문장으로 책을 시작하냔 말이다!


무크따가 생물학적 진화/창조론만을 다루는 데 그치지 않고 우주의 탄생까지도 함께 다룬다는 점에서 독자들은 이 책의 또 하나의 장점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즉, 무크따는 그 둘 모두를 매개로 하여 한 단계 위의 개념에 대한 편견을 깨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 같다. 이런 의미에서 무크따는 부제에 해당하는 과학과 신앙의 편견 깨기에 잘 부합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무크따는 자상하고 지혜로운 스승으로부터 일대일 과외를 받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러므로 이 책은 어떤 커다란 학회에 가서 정보를 수집하는 경쟁적인 방법보다, 자기가 잘 아는 선생님으로부터 개인적으로 친절하게 이것저것 물어보며 배우는 것을 선호하는 독자들에게 특히 권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게 되면 과학과 신앙을 더 이상 대립적으로 보지 않게 될 것이며, 저자처럼 과학과 신앙을 모두 겸하여 조화를 이루고, 또 서로를 더욱 발전/보완시켜주는 관계로 볼 수 있게 되리라 확신한다. 더불어, 탈기독교를 경험한 나한교들 중엔 이러한 편견으로부터의 해방이 아주 결정적으로 어필하는 케이스도 많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의 회심도 내심 기대해 본다. 박 기자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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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북클럽 이야기 | 전주 북클럽]





| 김재상 (전주 북클럽 회원)



7장 의미 추구와 과학의 한계


7장에서 알리스터 맥그라스는 앞에서 논의해왔던 작은 결론을 적고 있다. 기독 신앙과 의미라는 맥락에서 과학과 기독신앙의 대화에 대한 한 꼭지를 마무리하고 있다. <우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를 시작하면서, 맥그라스는 과학과 기독교의 전쟁/갈등 서사는 두 진영의 본질적 관계를 드러내지 못한다고 보았다. 도리어 그는 기독신앙의 서사와 과학의 서사가 함께 할 때 우주 실재가 지니고 있는 풍성한 의미들이 드러난다고 보았다. 


실재는 한 측면이나 한 관점에서만 읽히지 않는다. 실재는 다양한 측면이나 층위에서 여러 의미를 보인다. 실재에 대한 건전한 이해는 여러 관점에서 찾을 수 있는 다양한 의미를 종합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맥그라스는 이러한 비판적 실재론을 근간으로 하여, 실재에 대한 과학과 기독교 각각의 설명이 지니고 있는 의미들을 조화시키고자 한다. 그래서 그는 4장에서 우주, 5장에서 다윈 진화론, 6장에서는 인간 본성에 대해 과학과 기독교가 지닌 다양한 의미들을 제시하며 그 의미 가운데 과학과 기독교의 만남이 지닌 의의를 적었다. 그리고 7장에서는 작은 결론을 내리고 있다.


알리스터 맥그라스에 따르면, 인간은 궁극적 질문을 던지는 존재이다. 그 질문에 대한 답 가운데서 실재의 의미를 발견해간다. 그 의미들은 삶에 가치를 부여하며 생존의지를 불러일으킨다. 실재에 대한 의미를 품고 있는 답을 기독교만이 주지는 않는다. 과학 역시 줄 수 있다. 그런데 우주를 탐구하며 의미를 주는 과학은 결코 전체 그림을 볼 수 없다는 점이다. 맥그라스는 마치 전체 그림을 보는 듯이 의미가 담긴 답을 하려는, 왜곡된 과학을 과학제국주의라고 하고 있다. 과학제국주의는 수정이 가능한 우연적 참인 특정 과학 이론이나 체계를 필연적이며 보편적 참으로 확장시키는 우를 범한다. 그리고 형이상학적이며 초월적인 주장이나 신념을 방법론상으로 제거하는 과학제국주의가 실재에 대한 건전한 의미를 준다는 것은 만무하다. 


맥그라스는 과학제국주의를 거부하는 과학이 기독신앙과 함께 상호보완하며 실재에 대한 의미를 풍성히 제시할 수 있다고 보았다. 과학은 인간에 대해 물리학, 유전학, 생리학 설명을 제공한다. 인간의 몸, 기관, 조직, 세포, 유전자 등의 기능과 형성에 대한 설명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들만으로 인간의 정체성이나 본성을 우리는 알 수 없다. 인생의 의미를 다 파악할 수 없다. 기독신앙이 드러내는 인생의 조명이 여기에 필요하다. 삶에 대한 신의 계시와 섭리에 대한 이해와 과학이 주는 설명이 서로 씨줄과 날줄이 되어 인생의 의미를 엮어간다. 과학이 그림의 일부를 세밀히 설명해준다면, 기독신앙은 그림의 큰 틀을 보여준다. 


생각해볼 점


* 알리스터 맥그라스는 과학이 그림의 부분을 설명한다면 종교는 전체 그림을 설명한다고 비유하고 있다. 어떤 점에서 종교가 전체 그림을 설명한다고 보아야 하는가? 종교도 전체 그림의 작은 퍼즐들을 제공한다고 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종교는 계시 그 자체가 아니다. 계시에 대한 해석 결과가 종교를 형성한다. 그리고 계시가 온전한 그림 전체를 보여준다 하더라도 그 계시에 대한 인간의 인식과 해석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기에 우주 실재가 지닌 의미를 파악해 가는 데에는, 과학만으로 종교만으로는 부족하다. 과학과 종교가 제시하는 의미의 지도를 함께 모아갈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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