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과정 II (2기)

과학과 신학에 대한 이해 정리 및 삶의 현장 분석 적용    |    심기주


  시간이 지나고 어느덧 과신대 기초과정2도 마무리단계에 접어들었다. 그런데 어쩌다 여기까지 왔을까? 어쩌다가 나는 지난 4년 동안 아무도 시키지도 않았는데 이 신학과 과학이라는 주제에 흠뻑 빠지게 된 걸까? 신앙에 관심은 있었지만 신앙은 내 일상의 삶과 내 꿈과는 조금 떨어진 독립적인 무언가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님을 계속해서 깨닫게 되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혼자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왜 우릴 공동체로 부르셨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작년 하반기 때 숭실대에서 청강한 ‘창조신앙과 자연과학’ 수업을 시작으로 과학과 신학의 관계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 공동체가 내게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번 과신대 기초과정2에서 여러 분야에서 일하시는 다양한 분들을 만나게 되면서 때로는 날카롭고 냉철하게, 때로는 마음 뜨거운 메시지로 함께 발제하고 토론하고 나눌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또 이 강의는 단지 이 수업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과신대를 통하여 내 마음 속 깊이 덮어두었던 신앙에 대한 날카롭고도 냉정한 질문을 던지면서 신앙을 좀 더 현실과 가깝게 만들 수 있는 도구가 될 수 있을 것 같고 또 이미 어느 정도는 그렇게 된 것 같기도 하다. 주변에서 신앙과 과학, 혹은 신앙과 일상 사이에서 갈등하거나 고민하는 사람들, 혹은 그저 피했던 사람들에게 신앙과 과학, 신앙과 일상은 얼마든지 양립 가능하며, 신앙은 과학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을 포괄하는 더 높은 차원의 가치임을 알려줄 수 있었다. 


  또 한 가지 이 강의를 통해 얻게 된 것은 쪽글로 적거나 머릿속에서 정리했었던 신학과 과학에 대한 내용을 마음먹고 체계적으로 정리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는 것이다.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테지만 글로 잘 정리해서 남겨놓으면 후에 분명히 큰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감사하게도 예상 외로 얻을 수 있었던 통찰은 바로 여러 창조론 견해에 대한 논리와 생각이었다. 특히 이번에 과도기 13,14장에 대한 발제와 창조 기사 논쟁에 대한 논평을 쓰면서 창조론에는 ‘정말 말도 안되는 음모론’과 ‘굉장히 확실하고 냉철한 정설’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전통적인 고대, 중세의 창조론부터 진화적 창조론까지 굉장히 다양한 견해가 복잡하게 얽혀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각자의 견해는 나름의 신학적 토대가 있음을 알게 되었고 상대방의 견해를 비판하는 논리와 그 이유를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다. 사실 그래서 ‘창조 기사 논쟁’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든 생각은 ‘함부로 판단하지 말자’와 ‘나와 생각이 달라도 끝까지 들어보자’였다. 물론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의 견해를 오래듣고 있는 것은 힘든 일이다. 하지만 진지하게 그 사람의 말을 들으면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측면을 볼 수 있고 다시 나의 입장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이것이 바로 토론의 순기능이다. 이는 비단 과학과 신학의 관계뿐만 아니라 삶에서 맞닥뜨리는 여러 문제들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 같다. 하나님은 우리를 서로 다른 모습으로 창조하셨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회복된 우리의 모습은 획일성이 아니라 개성이다. 우리는 모두 다르지만 그렇기 때문에 대화한다. 우리의 다름 속에서 서로가 생각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하고, 내가 하나님을 온전히 알지 못한다는 사실에 겸손할 수 있다. 물론 이 말이 여기저기 휩쓸려 다니라는 말은 아니다. 다만, 귀를 틀어막고 내 생각을 누군가에게 강요해서는 대화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내가 아는 하나님에 대해 확신을 가져야 하겠지만 틀릴 수도 있다는 여지를 열어두자는 것이다. 이런 태도로 주변 사람들에게 다가갈 때 그들도 마음의 문을 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이걸 실천하는 것은 지금부터 풀어가야 할 나의 숙제인 것 같다.


  인생의 방향에 대해서도 이번 수업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무크따를 처음 접했을 때, 유신진화론(진화적 창조론)은 진화론에 신만 끼얹은 무책임한 끼워맞추기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보다는 남이 뭐라고 하든 자기 갈 길을 꿋꿋하게 가는 창조과학이 진짜 신앙처럼 보였고, 그렇게 믿지 않을 거라면 믿음은 그다지 ‘믿음직하지’ 않아 보였다. 그런데 사실 이건 정보의 불균형과 편견 때문에 그런 것이었다. 사실 다윈의 ‘종의 기원’ 이전에도 이미 기독교 내에서 다양한 창조론 견해들이 있었고, ‘종의 기원’ 출판 당시에도 기독교계와 과학계의 다양한 견해들이 있었다. 결국 이 문제는 ‘초자연적인 것’만이 하나님이 하신 것이고 ‘자연법칙으로 설명이 되는 것’은 하나님이 필요없다는 고정관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자연법칙으로 설명이 된다면 하나님이 필요없다는 생각은 과학을 뛰어넘는 형이상학적 설명이다. 과학은 이 문제에 대해서 침묵한다. 나는 바로 여기서 기독교 신앙의 원리를 다시금 깨달았다. ‘과학적으로 하나님이 보이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믿기 때문에 하나님을 느낄 수 있는 것’, 이것이 바로 신앙인 것이다. 내게 신앙은 과학으로 따질 수 있는 차원의 것이 아니라 나의 세계관이며 인생을 아우르는 버팀목이다. 아무도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것이 신앙이고, 이해관계 때문에 빠져나올 수 없는 늪을 헤쳐 나올 수 있는 것이 아가페적인 사랑, 즉 신앙이며 또한 내가 있는 배움터와 일터에서 실천해나갈 방향성인 것 같다.



신학과 과학, 철학과 공학 

그 합주 앞에 서서 감상하다

불협화음이 될 것 같아 뺄 것을 찾아보다

뜻밖의 하모니에 멍하니 서있다

감상하다 고민하다 어디로 갈까

눈앞의 심포니에 마음이 간다.

융합이다 대화다 말만 하지 말고

기꺼이 빠져들어 한번 찾아보다

나의 길은 어딜까 괜찮은 걸까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이상한 대학생.



  나는 커서 뭐가 될까? 맡은 바가 늘어날수록 권리도 늘어나지만 그에 따른 죄의 유혹 또한 늘어날 것이다. 무엇을 맡게 되든 능히 유혹을 뿌리치고 하나님께 의지할 수 있길, 그렇게 어떤 질문이든 솔직하게 하나님께 말하고 또 공동체에 말하는 진실한 신앙인이 되길 기대한다. 


“신앙은 질문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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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과신대 [기초과정 II (2기)] 과정의 보고서 중 작성자의 동의를 얻어 올리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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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