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과정 II (2기)

창조기사논쟁(새물결플러스) 서평    |    최재공



문학적으로 본 “날”, 상호텍스트성과 배경 (리처드 E. 에이버벡)

창세기가 쓰일 당시의 문화적 상식에 기대어 쓰였다. 당시의 한계 상황을 인정하는 해석이다. 6일 창조와 안식일은 유비적 표현으로 해석해야 한다. 창세기는 유비와 의인화 그리고 당시 자주 나오는 패턴적 기술로 이루어졌다.


문자적 해석 (토드 S. 비일)

창세기의 비유적 해석의 정당성이 없다. 창세기의 어떤 부분은 역사적 사실로 해석하고 어떤 부분은 비유적으로 해석하는 건 해석학적으로 정당성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문맥에 따른 해석: 유비적 “날들” (C. 존 콜린스)

성서의 본래 의도대로 그것을 사용해야 옳다. 이는 쓰인 시기와 쓴 사람과 당시의 독자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창세기의 각 장들을 문학적, 언어적 관련성에 기인한 해석을 해야 할 것이다. 창조 6일이 우주나 지구의 시작이어야 할 근거는 없다. 창세기는 다른 책과 다르게 “고양된 느낌”을 느낄 수 있다. 이는 창세기가 설명문이 아닌 어떤 묘사를 통해 더욱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게 하는 문학 장치가 특징적으로 존재한다는 말이다. 창조기사는 패턴과 유비를 사용한다는 점을 고려하여 해석해야 한다. 세상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how에 대한 대답을 위한 책이 아니다.


창세기 1-2장이 주는 교훈(혹은 교훈이 아닌 것) (트렘퍼 롱맨)

성서는 각각의 책에 따라 장르를 파악하고 그에 따라 읽고 해석해야 한다. 창세기 1-2장을 해석할 때는 첫 째, 비유 언어를 사용했다는 것, 둘 째, 두 창조 기사의 순서가 다르다는 것, 셋 째, 고대 근동의 창조 기사들과 상호작용 한다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한다. 즉 성서는 고대 근동의 신화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고대 우주론을 반영하는 창세기 1장 (존 H. 월튼)

현시대의 우리는 1차 독자가 아님을 인식하고 성서가 쓰였을 당시의 고대 이스라엘인들의 사고방식과 문화를 통해 텍스트를 해석해야 한다. 중요한 부분은 창세기 창조기사를 기능 중심의 우주 존재론에 기대어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능이 중시되는 대화에서 물질의 존재는 부차적인 것이 된다. 물론 하나님이 어느 시점에 무에서부터 물질을 창조했지만 창세기 1장의 창조는 기능의 창조를 말한다.




창세기를 읽는 나의 관점


  창조기사 논쟁은 나에게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창세기를 어떻게 읽어야지 하는 선명한 관점은 없었지만 저자들의 관점은 생소했기 때문이다. 특히 창세기를 ‘기능’에 초점을 둔 창조이야기라는 설명이 나를 겸손하게 만들었다. 창조하면 당연히 물질의 창조로만 이해하고 있었는데 나의 생각의 비루함이 여실히 드러났다. 기능을 중시하는 해석은 창세기 이야기가 어떤 의미를 생성하고 그로인해 독자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게 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려는 성경의 목적과 일치한다. 또한 자연세계의 물질 양상을 탐구하는 과학이라는 장르와 성경을 분리시키는 데에 적절한 해석법이기도 하다. 성경을 과학책으로 읽으려고 하는 오류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몇몇 저자들에서 공통적으로 나온 해석은 ‘쓰인 당시의~’를 고려하라는 것이다. 공감하는 부분이다. 성경은 진리의 말씀이기 때문에 시공간을 초월하여 적용가능하다는 믿음은 있다. 하지만 그건 성경 전체의 단어들, 문장들 그리고 문단들에 의해 해석된 하나님의 어떤 메시지가 진리의 말씀이란 말이지 진리의 메시지를 구성하는 각 요소들은 시공간을 초월하지 않는다. 성경이 쓰인 사회 문화적 맥락 안에서의 해석 이후에 오늘날의 나의 상황에 적용을 모색해야 성경을 제대로 읽는 것이다.


  장르 개념으로 창세기를 들여다본 것도 흥미로웠다. 문학의 내용과 상관없이 장르 자체가 주는 정보가 있다. 분명 창세기는 설명문이 아닌 어떤 “격양된” 표현과 비유적 표현이 있는 장르이다. 설명문만이 역사성이 있거나 권위가 있는 건 아니다. 이 책을 읽기 전에 나에게 있었던 오류는 성경의 무오성을 담을 수 있는 장르는 설명문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렇다고 성경 전체를 문자주의적으로 읽진 않고 내포된 어떤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장르는 여전히 어떤 명백한 증거들이 있는 역사책이라고 생각했다. 신화적 상상력에 의해 쓰인 이야기책이 아니라. 하지만 장르 개념은 성경을 특히 창세기를 역사책 그 이상의 무엇으로 생각할 수 있게 해주었다.


  하지만 문자적 해석은 나에게 별로 설득력 있지 않았다. 성경을 어떤 고정된 시선으로 일괄되게 해석해야하다는 건 받아들이기 힘들다. 왜냐하면 성경 각 책의 저자도 다르고 쓰인 시대도 다르고 장소도 다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감도 성경 저자들에게 일괄되게 임했다고 볼 근거도 없다. 성경 저자의 의도에 따라 달리 해석하는 것이 합리적이지 어떤 해석의 방법을 결정하고 읽는 건 정작 성경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발견하지 못하게 할 뿐이다. 같은 저자가 쓴 같은 책 안에서도 문맥과 분위기를 고려하여 앞 절 부분과 뒷 절 부분을 달리 해석하는 것도 같은 의미에서 가능하다고 본다.


  사실 성경을 잘 안 읽는 나에게 이런 성경해석의 지평에 대한 논의는 커피 맛을 잘 모르는 내가 커피 향에 대한 갑논을박에 대한 글을 읽는 것만큼이나 어떤 감동이나 감수성을 자극하지는 않았다. 다만 다양한 성경 해석의 지평의 존재를 알았으니 성경을 실제로 읽을 때 내가 한 해석이 분명 잘못된 해석과 적용일 수 있다는 의심은 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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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과신대 [기초과정 II (2기)] 과정의 보고서 중 작성자의 동의를 얻어 올리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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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