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빨리 크세요!"

뒤에 올 여성들에게 | 마이라 스트로버 | 제현주 역 | 동녘 | 2018


문성실[각주:1]



처음 재미 여성과학자 모임을 갔을 때였다. 연사로 오신 분께 인사를 드리는데, 앞으로 이 모임을 위해서 힘써 보라는 권유를 받았다. ‘전 아직 어려서요’ 그때는 어렸다. 한국에서 박사를 마치고 미국으로 포닥을 온 지 막 1년이 넘을 때였다. 미국 사정도 모르는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어리다는 말뿐이였다.


그럼, 빨리 크세요!


그분은 나에게 이렇게 이야기했었다. 그 한마디가 거의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내 마음에 남아있다. 종종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라는 자책의 순간이나 슬럼프의 문턱에서 꺼내 보는 말이 되었다. 평생을 노동의 관점에서 싸워온 페미니스트 경제학자 마이라 스트로버의 회고록 <뒤에 올 여성들에게>는 희미한 의미로 내 마음에 남아있던 “빨리 크세요”라는 말의 의미를 선명한 의미로 확신시켜 주었다.


1970년 버클리대 강사 시절, 교수 임용에서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탈락되었던 날, 그는 샌프란시스코 베이브리지 위에서 ‘페미니스트’가 되었다. 그는 이렇게 회고한다. 


그날의 분노와 각성이 내 나머지 인생에 에너지를 불어넣어 줄 터였다. 그 분노와 각성이 나를 이끌었고, 덕분에 새로운 학문 분야를 만들고, 성차별을 연구하고, 그에 대항해 싸우는 새로운 조직을 세우는 일원이 될 수 있었다.


학자로서 부당한 성차별을 받은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연구’를 택했다. 새로운 분노를 품고 도서관에 앉아 ‘여성’의 이야기를 찾기 시작했다. 그가 150년 전의 엘리자베스 캐디 스탠턴의 <감성 선언서 Declaration of Sentiments>를 찾았을 때, 그는 스탠턴을 멘토로 받아들이며, “언니”로 삼는다. 여성의 대부분이 교수가 아닌 강사로 일하던 버클리의 “언니들”이 마음을 모으기 시작했다. 마이라는 그때를 “자매애가 싹텄다”라고 회고한다. 그리고, 버클리에서 처음으로 “여성과 노동”이라는 강의를 개설한다. 자유주의적인 페미니스트의 편에 섰던 마이라는 이 강의를 통해 만난 ‘언니들’을 통해 “여성이 일터에서 평등을 누리려면 사회 전체가 달라져야 한다.”는 급진주의의 편에 서게 된다. 그가 걸어온 페미니스트의 길은 경제 학내에서만 여성을 다룬 것이 아닌, 가정과 노동조직, 정부 측면에서 어떤 새로운 정책이 필요한지 파악하는 다학문적 여정을 통해 여성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영향력을 높이고자 노력했다.


1970년대 경제학 분야의 언니들은 대단했다. American Economic Association (AEA) 연례 회의에서 그들은 ‘여성을 위한 경제적 평등에 필요한 것’이라는 세션을 열었으며, 많은 여성 경제학자와 젊은 대학원생(여성과 남성)이 참여하였고, 그 후 AEA 사업 회의에서 캐럴린 쇼 벨은 “경제학 관련 직종에 여성의 비율이 낮은 상황을 바로잡을 것”, “경제학자들 사이의 성차별을 제거하기 위한 적극적 프로그램을 도입할 것”과 연례 회의에 아이를 맡길 수 있는 보육 서비스를 제공하라고 AEA에 요청했다. 현재에도 여러 학회에서 생각지도 않고 노력하지도 않은 일들이 무려 40년 전에 경제학 분야에서는 일어났었다.


그는 스탠퍼드 내의 여성 교수가 적은 급여를 받는 문제를 제기하고, 스트로버 보고서를 작성했다. 여성은 급여 분포 하위 1/5을 과대 대표했고, 상위 1/5을 과소 대표했다. 그는 이 보고서를 통해 교무처장이 여성 교수의 급여 수준을 지속적으로 조사하도록 요구했고, 여성 교수가 적은 학과는 여성 교수진을 늘리기 위한 채용 계획을 수립하도록 요청했으며, 성희롱에 대한 인식을 교육하고 섬세하게 만들기 위한 지속 프로그램을 개설했다. 이 스트로버 보고서는 현재의 ‘다양성 보고서’의 시초가 아닐까 한다.


자네는 정상인가? 결혼해서 아이를 가질 거라면 경제학 박사 학위는 왜 따려고 하나?

매일 아침 보스턴에서 케임브리지로 차를 몰고 오면서, 오늘이 바로 그날이라고 중얼거렸다. 그곳은 남성 천지였고, 임신은 본질적으로 남성의 일이 아니었다. 임신 사실을 말하며 그들이 내 명예 남성 지위를 빼앗을 것 같았다. 좋을 것은 하나도 없어 보였다.

나는 샘의 커리어가 내 커리어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에 완전히 빠진 채였다.

샘은 그 과정에서 자신이 아내에게 원하는 것은 조력자이지 ‘남자의 게임’을 하려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버드 박사과정 면접에서 그가 들었던 말, 

임신 사실을 언제 알릴지 몰라 하루하루 전전긍긍하며 보냈던 시간들, 

자신의 커리어보다 남편의 커리어를 늘 우선에 두고, 

박 육아를 감당해야 했던 그의 삶의 회고는 

40년이 지난 현재의 여성들이 동일하게 겪고 있고 듣고 있는 말과 생각이다. 


그가 ‘언니들’과 함께 세웠던 Center for Research on Women (CROW) (현 클라이먼 젠더 연구원) 35주년 기념식에서 그는 35년이 지났어도 ‘젠더 혁명’은 교착 상태라고 이야기한다.


남성 수입 대비 여성의 수입은 늘지 않는다. 어머니인 여성은 엄마 벌금을 문다. 여성이 가장인 가족은 어느 때보다 빈곤한 상태일 가능성이 크다. 이공계 여성의 비율은 여전히 매우 낮고, 대기업 내 여성 리더나 기업 이사회 내 여성 이사는 아직 당황스러우리만치 부족하다.


‘젠더 혁명’은 오랜 시간 쏟아부은 시간과 노력에 비해 부단히 경제적이지 못한 모순에 직면해있다. 그는 “나는 이제 처음 시작한 때보다 내가 추구하는 변화가 심원하고 어려운 것임을, 내 삶에서는 원했던 결과를 볼 수 없을 것임을 이해한다.”라고 이야기한다.


이 책의 마이라 스트로버의 40년 세월의 회고는 ‘마이라’라는 여성에게만 벌어진 일이 아닌 세대와 시대를 초월한 여성들에게 동일하게 일어나고 있는 "현재 진행형"인 일이다. 그는 ‘나처럼 하면 성공할 수 있다’나 ‘열심히 하면 모든 것이 잘 된다’라는 전형적인 성공의 롤모델을 보여주지 않는다. 늘 힘들게 걸어왔고, 늘 일과 가정의 장애물이 있었다. 그는 자신을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힘들고 장애물이 혼재한 그의 삶을 그는 결코 혼자 걸어오지 않았다. 그는 언니들의 ‘자매애’와 남성들의 지지를 통해 지금까지 걸어왔다. 나도 그 길을 걷고 있다. 비록 나는 그보다 40년이란 시간 뒤를 걷고 있지만, 마이라와 나는 함께 걷고 있는 것이다.


“그럼, 빨리 크세요!”의 의미는 내게는 내 뒤에 올 누군가를 위해 앞장서서 걸어가야 하는, 그래서 좀 더 외치고, 좀 더 글로 남기고, 좀 더 몸부림쳐야 하는 그런 것이다.


내 뒤에 올 여성들을 위해서…


  1. 바이러스 백신 연구을 하는 "평범한 여성 과학자". 아이들과 과학놀이는 즐기는 "랩순이맘". 소명있는 삶을 살고자 하는 "텐트메이커". 브릭 [논문 밖 과학읽기]와 [과학협주곡]에 글을 연재. [본문으로]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