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신대 칼럼


스킨십, 소통, 그리스도



김영웅 박사[각주:1] 



사랑하는 아내와 키스를 하고 잠자리에서 빠져나와 아들의 방으로 향한다. 아직도 곤히 잠들어 있는, 천사 같은 아들을 꼬옥 안아주며 볼에 뽀뽀를 한다. 사랑한다고 말을 한다. 나의 하루가 시작된다. 스킨십을 하며 사랑을 표현하는 것만큼 우리가 몸을 가진 존재임을 감사하게 되는 순간이 또 있을까. 사랑할 수 있고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 그렇다. 우린 인간이다. 몸을 가진 인간이다.


인간은 유한한 육신에 갇혀 있기 때문에, 우린 자칫 인간의 육신을 생각할 때면 제한받고 통제받는다는, 부정적인 의미만을 강조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난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유한한 인간을 창조하신 이유를 제한과 통제보다는 오히려 자유함에서 찾는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질 수 있고, 그 만짐으로 인해 사랑을 느끼고 비로소 안정감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우리 육체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며, 이는 곧 자유함이기 때문이다. 창조된 우리의 육체는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어쩌면 천사가 흠모하는 인간의 본질은, 그들은 가지지 못했으나 인간만이 가질 수 있었던, 바로 우리 육체에 있을지도 모른다.


생물학자로서 나는 생명체를 연구하며 그 신비함에 깊이 경탄할 때가 많다. 특히, 도저히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정교하고도 완벽하게 디자인된 생명체의 신비를 하나님의 창조라고 믿는 내가 이런 순간을 마주할 때면, 창조자 앞에서 전적으로 겸허해질 수밖에 없다. 우리 생물학자들은 문명이 급속도로 발달한 21세기에도 여전히 감추어져 있는 생명의 비밀을 찾아내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그리고 마침내 드러난 비밀 앞에서 그 누구보다도 먼저 감탄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진다. 그러면서 어떻게 그러한 신비가 가능한지 그 메커니즘을 밝혀내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과학자로서 일상의 시간은 하나님의 창조물을 연구하는 것이기에, 아무리 새로운 비밀을 많이 밝히고 안다 하더라도 전혀 지루하지가 않다. 오히려 더 알고 싶고 또 알고 싶을 뿐이다. 무한한 생명의 비밀 앞에서 과학자는 하나의 점에 불과하다. 이는 마치 칼 세이건의 제안에 따라 보이저 1호가 카메라를 돌려 지구를 포착한, 희미한 푸른 점(Pale Blue Dot)과도 같은 의미일 것이다.


폴 브랜드 & 필립 얀시,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손길』(생명의말씀사, 2016)


폴 브랜드를 책으로 처음 만났다. 그는 뛰어난 실력을 갖춘 정형외과 의사였을 뿐 아니라, 선교사적인 사명을 자신의 소명이라 여기고 한 평생을 보낸 평신도 선교사였다. 그런데 그의 선교지는 어떤 특정한 지역이기보다는 한센병과 한센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었다.


문둥병이라고도 불리는 한센병은 자멸하는 병이다. 사지가 서서히 절단되고 코가 문드러지는 육신의 처참함을 동반하는 병이다. 그러나 한센병 환자들에게는 그 이상의 고통이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그 고통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이다. 한센병은 주로 신경 세포를 공격하여 감각을 차단시켜 버린다. 이것은 어느 날 손가락 하나가 잘려도, 그들의 비극은 손가락 하나를 잃었다는 사실이기보다는 그 아픔을 전혀 못 느낀다는 데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폴 브랜드는 어느 날 그의 한센병 연구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게 된다. '한센병의 무서운 결과는 환자들이 고통 감각을 상실했기 때문이 아닐까?' 그 이후 그는 한센병이 조직의 부패 없이도, 통증의 감각을 상실시킨다는 사실을 최초로 발견하게 된다. 그는 외과의사로서 한센병 환자들의 외과적 수술과 재활에 현격한 관심을 기울인 결과로 그 분야에 있어 세계적인 권위자가 되었다. 또한 그는 한센병 환자들을 위한 재활 공동체를 운영하며 평생을 한센병 환자들과 함께 하는 사랑을 실천한 우리들의 위대한 스승이기도 하다.


이 책은 어느 날 필립 얀시가 아내의 벽장에 아무렇게나 뒹굴던 한 편의 에세이를 읽고 난 후, 어떤 강한 힘에 이끌려 그 에세이의 저자였던 폴 브랜드를 직접 찾아가 만나게 되면서 비로소 탄생할 수 있었다. 이제는 어느덧 기독교 작가로서 탄탄한 자리매김을 하고 있는 필립 얀시이지만, 폴 브랜드를 만날 때만 해도 그는 이십 대의 젊은 저널리스트였다. 폴 브랜드와의 만남은 필립 얀시의 인생에 있어서 커다란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폴 브랜드가 죽고 나서 그는 회고한다. 폴 브랜드를 통해서 이론으로만 들었던 기독교적 삶이 현실이 되어 나타날 수 있다는 확신뿐 아니라, 겸손함을 잃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을 희생적으로 섬기면서도 얼마든지 기쁨과 만족을 얻을 수 있다는 확신까지도 얻을 수 있었다고 말이다. 그는 그런 확신이 미약해질 때면 항상 폴 브랜드와 함께 했던 시간을 떠올린다고도 고백한다. 폴 브랜드는 필립 얀시에게 있어서 실로 거인이었던 것이다.



우리의 몸을 이루는 가장 작은 단위인 '세포'에서 출발하여 (1부), 이 책은, 골격을 유지해 주는 힘이 되는 '뼈' (2부), 다른 생명과 소통하는 통로가 되어주는 '피부' (3부),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모여 우리들의 몸을 움직이는 신비한 메커니즘인 '동작'에 이르기까지 (4부),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리들의 몸을 비유로 하여 실로 우주적인 그리스도의 몸과 교회 공동체에 대한 메시지를 담담히 선포한다. 바울 역시 교회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면서 인간의 몸과 각 기관을 비유했음은 우리가 모두 잘 아는 바다. 우리 각자는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하나의 지체인 것이다. 폴 브랜드는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우리는 하나의 세포라고 한다.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세포, 우리들 각자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이루는 가장 작은 단위라는 것이다.


세포가 가장 세포다울 때는 하나의 세포가 주위의 세포와 유기적인 공동체를 이루며, 자신이 몸의 일부라는 사실을 잘 알고 충성하여 전체 몸이 정상적인 동작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줄 때다(이것이 책의 목차가 1부 ‘세포’에서 시작하여 4부 ‘동작’으로 마치는 의미이다). 세포다움은 세포의 dependence에 있기보단 inter-dependence에 있는 것이다. 작은 하나의 완벽함보다는 연약한 하나일지라도 조화롭게 모여 큰 하나를 이루는 것에 바로 세포의 존재 이유와 정체성의 본질이 있다.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세포에 비유한다면, 마찬가지 논리가 적용된다. 우리들이 자본주의적이고 성공지향적이며 물질지향적인 가치관에 묶인 채 개인의 번영과 안녕에만, 그리고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유익만을 추구한다면, 그 세포들이 모여 이루는 그리스도의 몸이 어떻게 될는지는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세포 중에서도 어떤 세포는 자신의 생명에만 연연하여 주위의 세포들과 전혀 소통하지도 않고, 자신이 전체 몸의 일부인 것을 망각한 채 몸에 충성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독립적으로 사는 쪽을 선택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세포를 우린 암세포라고 부른다. 암세포는 자기중심의 원죄를 짊어진 인간의 이기적인 본질과도 너무나 닮았다.



필립 얀시를 통하여 폴 브랜드는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각자 그리스도의 우주적인 몸을 이루는 하나의 세포이지만, 똑같은 기능을 가진 클론이 아니라 서로 다른 기능을 가진 세포로 분화되어 있으면서도, 그래서 다양성을 가질 수밖에 없으면서도, 그러므로 서로 연합하고 봉사하고 헌신하여 건강한 공동체 (교회)를 이루는 임무를 맡았다고 말이다. 그러나 현실을 둘러보면, 교회만큼 상이한 사람들이 모인 기관도 없다. 사회에서 통용되던 가치체계나 기준으로는 그 무엇으로도 하나의 집합으로 모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단 한 가지, 오직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머리로 삼고 있는 존재라는 이유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것도 공통점이 없다. 하지만 바로 여기에 우리들의 연합함의 비밀이 있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우리가 연합할 수 있는 근거는 우리의 유사점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다양성에서부터 시작된다.


연합의 근거와 시작이 되어주는 다양성은 또한 우리들이 새로운 장소에서 낯선 만남을 가질 때에도 하나님 나라가 임한 사람이라면, 함께 한 몸을 이루는 세포요, 서로 공동체를 이뤄야 하는 존재임을 간파하며 결속력을 느낄 수 있게 해 주는 이유가 된다. 처음 보는 사람도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세포이기에 금세 한 가족이 될 수 있다. 서로가 다른 기관을 이루는 세포이지만, 그래서 피부색이 다르고 형편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지만, 한 몸을 이루는 일부인 것처럼, 전 세계에 흩어진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자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일부다. 우리는 형제, 자매요, 가족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교회에게 남겨진 사명이요, 인간으로서 가장 인간다운 만족함을 얻을 수 있는 공동체의 환희다. 그리고 그것은 곧 사랑이다.



책을 덮고 글을 쓰니 어두워졌다. 나는 곧 잠자리에 들어가 잠을 청할 테고 아침에 눈을 뜨면 또다시 사랑스러운 아내의 키스와 사랑하는 아들의 포옹으로 내일을 시작할 테다. 그러나 어제와 오늘은 다르다. 건강한 세포가 우리 몸을 이루고 있으며, 골격을 유지해 주는 튼튼한 뼈와 다른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통로가 되어주는 피부가 내게 있음은, 그저 나 자신의 건강이나 내가 속한 가족 안에서의 소통만을 위한 것이 더 이상 아님을 느낀다. 우리는 우리가 속해져 있는 그리스도의 몸을 생각해야 한다.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향해야만 하고 충성해야만 하며, 나와 가족을 넘어선 모든 하나님 백성들과의 연합을 생각해야 한다고 나의 온몸이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더 큰 하나의 몸을 생각해야 한다. 좀 더 머리로부터 오는 시그널에 민감해져야 하고, 그 시그널에 우선순위를 두고 삶의 패턴과 궤도를 수정해야 한다. 지경이 더 넓혀질 시간표다.



  1. 분자생물학과 마우스 유전학을 기반으로 혈액암을 연구하는 과학자다. 미국 City of Hope에서 Staff Scientist로 일하고, 과신대 파사데나 북클럽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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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