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신대 칼럼

감정 배제하기?


박치욱 교수

(미국 퍼듀대학교 약학대학 / 과신대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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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누구도 감정이 개입된 판단을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과학을 공부하든 신학을 공부하든 학자라면 당연히 이성적인 판단을 존중하고 감정의 영향을 배제해야 한다. 학문적 결론을 도출해 내는 과정은 철저히 이성적이고 논리적이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만들어진 학문 결과는 우리의 감정과 무관한 것일까? 학자로서 시간과 노력을 들여 내린 연구의 결론이 근사하기도 하고 아름답기도 하고, 또 때론 왠지 궁색하거나 어색하기도 하다. 자신의 이론에 맞는 결과를 얻었을 때의 뿌듯함, 어긋나는 결과를 얻었을 때의 답답함, 이런 감정적인 반응을 부인할 수는 없다. 인간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감정적인 반응이 절대 연구 결과에 영향을 주어서는 안 된다. 그건 학자의 기본 소양이다. 그래서 학자들은 인간이면서도 인간의 한계를 극복해야만 하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신학과 과학의 연구 결과를 접하는 대중은 어떨까? 그들이 학자들의 객관적인 연구 결과에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그런 지극히 주관적인 감정으로 객관적인 연구 결과를 거부하는 경우도 본다. 주관적인 감정의 영향을 최대한 배제하도록 훈련받고, 객관적인 논리와 증거에 의해서만 결론을 내리려 노력하는 학자들에게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하지만 어쩌면 이런 감정적인 반응이 인간으로서 당연한 것이 아닐는지 싶기도 하다. 학자들도 자신의 연구 결과가 아름답다거나 궁색하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하물며 일반인들이 그런 감정적인 반응이 없기를 기대하는 건 무리가 아닐까?


우리는 누구나 자기만의 세계관을 갖고 산다. 새로운 지식, 새로운 정보가 들어오면 누구나 우선은 자신의 세계관에 맞는지 어긋나는지부터 살피게 된다.


세계관에 맞으면 통쾌하고 아름답고, 어긋나면 짜증나고 의심스럽다. 통괘하고 아름답다고 느낄 때마다 자신의 세계관은 반복해서 강화된다. 한 마디로 세상의 이치가 보이는 듯하다. 이런 자신의 세계관을 신념으로, 교리로 의심의 여지가 없는 원리로 만들어 버리는 경우도 있다. 안타깝지만 이 세상의 사람들이 그렇다. 사람이기에 그렇다.


신학과 과학을 대중에게 전달한다는 것, 어쩌면 필연적으로 삐걱거릴 수밖에 없는 일이다. 객관적인 결론에 대한 주관적 반응, 심지어는 자신의 세계관에 따른 취사선택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싶지만, 그렇다고 없는 것이 되지는 않는다. 어쩌면 건조한 감정을 배제한 지식만을 전달하는 것에서 끝나면 안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학자들이 느끼는 아름다움을 대중도 느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천체의 움직임이 물리 법칙으로 다 설명되는 그 아름다움, 생명의 다양성이 진화로 다 설명되는 그 아름다움, 생명 현상이 분자들의 반응성으로 다 설명되는 그 아름다움. 어쩌면 이런 감정적인 요소까지 전달이 되지 않는다면 지식의 전달은 파편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든다.


예전에 들은 어느 환자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그 환자는 사고로 감정 중추에 이상이 생겼다. 그런데 특이한 증상을 보인다. 자신의 어머니를 보고도 어머니와 똑같이 생긴 가짜라고 의심한다. 감정에 이상이 생겼는데, 어머니를 어머니로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시각정보 청각정보는 어머니가 맞는데 어머니라는 감정이 생기지 않는 것이다. 신학과 과학의 지식이란 어쩌면 이 환자의 어머니와 같은 안타까운 상황에 처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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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View Vol.15 / 20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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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